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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26. 2017

대화형 인터페이스의 숨은 전제(2)

사물과 대화한다는 것

Siri와 대화하다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나는 분명 기계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괜스레 화가 나는 것이다. 심지어는 시리가 하는 말에 약이 오르기도 한다. 

사용자: 시리야, 그만해.
Siri: 음... 멈출만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요.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하고 누가 말할 때 빼고요. 그런데, 전 어차피 춤도 안 춰요.

시리의 대답을 듣고 있노라면 재치 있는 대답이네, 하면서 은근히 약이 오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시리가 진짜 사람이 아니고, 살아있지도 않다는 사실을 모두 알면서 말이다. 우리는 왜 시리에게 약이 오르기도 하고, 때로 위로를 받기도 하는 걸까? 바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리를 사람처럼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 아니었어?!). 마치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우리는 시리에게 자꾸 말을 걸어보게 된다. '이 말엔 어떻게 대답할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말이다. 이런 행동은 '의인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Anthropomorphism: 의인관

의인관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Anthropomorphism
The showing or treating of animals, gods, and objects as if they are human in appearance, character, or behavior. The books "Alice in Wonderland", "Peter Rabbit", and "Winnie-the-Pooh" are classic examples of anthropomorphism.
출처 - Cambridge Dictionary


즉, 인간이 아닌 동물, 신, 물체를 마치 인간의 성격, 행동, 외형을 가진 것처럼 대하거나 그런 성질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아래의 정의에는 푸(Pooh)의 예시가 나와 있는데, 생각보다 많은 동화, 애니메이션, 이야기 등에서 의인관을 관찰할 수 있다. 대화형 인터페이스의 경우 의인관이 더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데, 언어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어학 분야에서 이루어졌던 영장류 연구들을 살펴보면, 인간 언어의 고유성을 더욱 확실하게 직감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를 가르쳐 주었을 때 생각보다 의사소통을 잘 하는 영장류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과 같이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아직 그런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대화를 모사하는 시리와 같은 에이전트를 사람처럼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질에 대해 심오하게 생각하지 않고도, 사용자는 자연스럽게 시리를 친구처럼, 심지어 연인처럼 대한다. 일상적인 우리의 태도에 의인관은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인 인지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애완견과의 상호작용에서도 관찰할 수 있는데, 우리는 집에 들어가면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뛰쳐나오는 행동을 보고 '보고 싶었구나, 많이 외로웠지' 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강아지가 그렇다고 말을 하지도, 텔레파시를 보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외로웠는지 알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마음에 빗대어 강아지가 어떠했을지를 추론하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진짜 어떤지 매번 알 수 없으니, 그렇게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그렇겠거니, 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심지어 작동하지 않는 리모컨을 보며 '얘 왜 이래, 약이 없나.. 밥을 줘야겠네' 하고 무심코 혼잣말을 할 때는 또 어떤가. 말은 커녕 살아있지도 않은 물건인 리모컨이 배가 고플 리가 없는데, 우리는 배가 고프니 건전지를 갈아줘야지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이 있을 리가 없는 시리에게 우리가 '시리야 미안해'하고 투정 부린 것에 대해 사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할 때는 무조건 사람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장땡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화형 인터페이스가 탑재된 시스템을 사용할 때 의인관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한 기대(expectations) 또한 무궁무진해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사람과 비슷할수록 사람에게 거는 대화의 수준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며, 따라서 시스템의 기술 수준, 기능, 사용성에 맞추어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해야 한다. Google Allo의 경우 이 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너는 누구니?' 질문에 대해 '저는 구글 어시스턴스입니다.' 하고 확실하게 선을 긋는다. '저는 당신의 친구이자 동료' 가 아니라 본인이 '시스템'임을 사용자에게 확실히 한번 더 인지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들은 시스템에 걸었던 기대를 한층 낮추게 되고, 기대가 낮아진 만큼 실망도 덜 하게 된다. 물론 머지않은 미래에 영화 'Her'의 사만다 같은 에이전트가 등장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의 대부분의 대화형 인터페이스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시스템의 기술적 수준에 따라서 에이전트의 Identity를 잘 설정해야 할 것이다. 기계와 사람 중간의 누군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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