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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루양 Mar 17. 2022

매듭을 지어야 '다음'이 있다

해외 아카이브 동향을 분석하는 C프로젝트의 보조연구원 

매듭을 지어야 '다음'이 있다

멋진 언니들과

멋진 언니로 일하고 싶은


   4학기 때 합류했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프로젝트는 해외 아카이브 동향을 분석하는 일이었다. 교수님 세 분을 보조하는 일이라 나의 업무 기여도는 작았지만, 회의가 많고 오프라인 미팅이 여러 차례 있어 교수님들과 좋은 대화를 많이 나눴다. 한 분은 나의 지도교수님이었고, 나머지 두 분은 타 학교 교수님이었는데, 세 분 모두 성실한 연구자라 함께 일하는 것만으로도 어깨 넘어 배울 점이 많았다.


  모두 여자 교수님이셔서 세 분의 다른 업무 스타일, 라이프 스타일을 엿보며 나의 미래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나도 계속 이렇게 공부하면 저분 같은 연구자가 될까? 저런 삶을 살게 될까? 이런 상상은 꽤나 고무적인 것이어서 마흔, 쉰이 한참 넘는 나이에도 현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멋진 '언니'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서슴없이 말했다. “10년 뒤에 저도 선생님처럼 일하고 있겠죠?” 계속 멋진 언니들과 일하고 싶은 바람이자, 나 역시 내 뒤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언니가 되고 싶은 바람이 담긴 말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마지막 쫑파티 자리였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이 팀의 리더인 대장 교수님이 이번 학기는 학교를 쉬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장 교수님은 학교에서도 학과장이시고, 개인적으로도 조직의 임원을 맡고 있는데, 그런 일을 다 내려놓고 한 학기 동안 논문쓰고 연구하는 시간을 갖고싶다고 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정년이 되기 전에 교수직에서 내려올 것이고, 그 이후의 삶은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면 좋을지 숙고해보겠다고 했다.


@픽사베이. 스페인식당에서 빠에야를 먹으며 쫑파티했다. 일을 기분좋게 끝낸 기쁨을 경험했던 C프로젝트


쉰이 넘어도

진로고민을 해야 한다면


  교수, 엄마, 임원. 남들은 최종 목표로 삼을만한 명찰을 다 갖고도 잠시 멈출 줄도, 새로운 시작에 나설 줄도 아는 교수님이 멋져보였다. "나는 공부를 잘하고 좋아하니까, 로스쿨에 가는 건 어떨까? 나이 많은 학생들도 많이 온다는데." 이렇게 자기 강점을 잘 알고 있는 점도 대장교수님의 매력이다. 이날 웃으면서 수다를 떨었지만, 정년이 다 되어서도 로스쿨에 입학할 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게 졸업해서 변호사로 새 인생을 꿈꾸는 이야기도 내게는 신선하게 들렸다. 인생 2막은 취미생활을 적극적으로 즐기거나 쉼에 가까운 활동을 누릴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이렇게 완전히 다른 직업인으로 변신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 며칠 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다른 선생님 한 분도 만났다. 이 선생님 역시 오래 한 직종에 매진하여 이룰만큼 이룬 어른인데, 남은 30년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늘 노동에 매여 있느라 하고 싶은 일을 돈 버는 일과 떼놓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거였다. 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대장교수님을 떠올렸고, 우리는 오십이 넘어서도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열망으로 살아가는 구나 싶었다. 


  하지만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과연 쉰이 넘도록 탐색 중이라면, 우리가 꿈꾸는 '하고 싶은 일'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좋아하는 일로만 구성된 그 업이 이제까지의 인생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인가? 대장교수님과 선생님이 말하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혼자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리다 문득 최근에 친구 T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픽사베이. 좋은 출발선에 선 두 사람을 보았다


시즌2는

시즌1이 끝나야 시작한다


나와 같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친구T는 최근에 오래 미뤄둔 개인 작업을 시작했다.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일이었고, T가 오래 준비한 그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너무 기뻐서 나도 기꺼이 스탭으로 참여해 돕기로 했다. T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고, 내가 막연히 꿈꾸는 이야기를 한참 떠들었다. 각자의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었고, 대화 속에서 함께 출렁거렸다.     


“있지. 지금 내 이야기가 남들에게는 재미없을 수도 있어. 이거 사실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거든.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꼭 만들어야 되겠더라고. 그래야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이 말이 너무 좋아서 나는 '2월의 좋은 말'로 T의 말을 기록해두기도 했다. 정말 맞는 말이다. 지금 붙잡고 있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완성하지 못한 이야기에 매달리고, 집착하고, 괴로워한다.


내가 아무리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해도 자꾸만 늘 같은 주제로 귀결되어, 똑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그 이야기를 아직 한번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날 우리는, 아직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을 다음 이야기를 위하여, 지금 붙잡고 있는 이야기를 꼭 완성해보자고 다짐했다.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결국 대장 교수님이나 선생님이 말한 '하고 싶은 일'은 그들의 다음 이야기인 셈이었다. 평생을 노력해 오래 꿈꾸던 자기의 일을, 자기 이야기를 완성했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다음 이야기를, 시즌2를 계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막연하게 '하고 싶은 일'이라는 추상적이고 완벽한 어떤 일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도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을 완성해야 다음 논문을 시작할  있다. 지금 매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마쳐야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있다. 지금  일을 매듭짓지 못하면, 결국  열망의 크기도, 꿈의 크기도 완성하지 못한  일에 매이고 만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지금 붙들고 있는 일을  매듭지어야   있는 것이다.


내가 대장교수님과 선생님의 어깨 넘어 배운  이거다. 최선의 매듭이 좋은 시작의 출발점이다. 그 출발선에 선 두 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나의 시즌2를 위해서 지금의 내가 할 일은, 나에게 맞는 평생의 업이 뭔지, 내가 잘하는 일이 뭔지 찾기보다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잘 마무리하는 거다. 고민은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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