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의 '우리다움'이 '나다움'이 되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저마다의 빛을 품고 있다. 향취를 머금고 있다.
차를 내리다 문득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열정으로, 열망으로, 때로는 용기로, 사랑의 감정으로 표현되는 그 빛은 스스로 가장 자기다울 때 세상으로 청연한 빛을 뿜어내고, 그 빛은 사방에 향기처럼 퍼져 든다고.
차(tea) 향을 맡으며 알게 되었다.
차 나무가 자라난 환경의 습기와 바람, 햇빛과 공기를 온몸으로 머금은 찻잎은 물과 만나 찻물로 우러날 때 은은한 향을 낸다.
찻잎의 겉모양새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의 속성은 물을 만날 때 비로소 온전히 드러난다. 찻잎에 배어 있는 각 차만의 특징, '차다움'은 알맞은 온도의 물과 적당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향기로 드러나고, 영롱한 빛, 투명한 금빛을 발한다.
차는 결코, 단 한 번의 이벤트로 완성될 수 없다.
수개월 동안 비, 바람과 햇살 아래서 찻잎은 자신만의 풍미를 완성해가는 시간을 견딘다. 사람, 혹은 기계의 칼날에 베이고, 솥의 열기를 버텨 내고 건조와 발효의 시간을 거쳐야만 갖가지 다른 종류의 차로 만들어진다.
건조된 찻잎은 가장 알맞은 온도의,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물과 닿아야 제대로 된 풍미를 낸다. 적당한 분초의 시간이 흐르고, 찻잎이 온몸으로 물의 온기를 머금으면서 한껏 웅크리고 있던 잎새가 서서히 풀어진다. 메말랐던 찻잎의 기운이 사방으로 새어 나오고 투명하던 물은 금세 금빛으로 물든다.
찻잎이 물속에 고스란히 잠겨 온 기운이 물에 젖어들고, 찻물에 향과 맛과 빛깔이 온전히 스며든 후에야 비로소 차는 차로서 완성된다.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한다.
다양한 환경과 사람들 사이, 온갖 자극에 노출되어 희로애락을 견디며 단련된 사람들의 내면은 저마다의 빛깔로 빚어진다. 그리고 때가 되어 적당한 온기와 거짓 없이 투명한 누군가의 마음과 맞닿아 서로에게 스며들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지나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무르익는다. 비로소 자신만이 낼 수 있는 본연의 색과 향취를 뿜어낸다.
'인연'이라 이름할 수 있다.
적당한 온기와 속되지 않은 진심을 나누어 '나다움'이 빚어지는 시간에 동행하여 준 이들을. 자신의 세월과 기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이들을.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자기다울 때 청연한 빚을 내고, 향기가 되어 사방으로 퍼진다. 그리고 그 빛과 향은 켜켜이 쌓인 인연과 더불어 빚어진다. '나다움'이란 인연과의 '우리다움'에서 배어나는 빛과 향취로부터 물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요하고 늦은 밤, 오늘따라 차향이 더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