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행 중독자가 되었는가
제법 여러 나라에 다녀본 것 같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100,266㎢ 에 달하는 대한민국의 내부 사정만으로는 호기심의 분량을 다 채우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 곳에만 머물러 살기에 세상은 너무 넓고, 지구 반대편에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일들이 끝없이 많다.
코로나19 이전,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외국에 돌아다녔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또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산다고 할 만큼 틈만 나면 비행기에 올랐다. 돈이 많다거나, 시간 여유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편견과 아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새로운 경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있는 신체적 나이의 마지노선이 삼십 대까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는 정신과 체력 에너지가 의지를 따라잡기 힘들어질 테고, 사고방식 또한 나름대로의 기준대로 굳어져서 외국에서 흡수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영향의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질 것 같았다.
여행은 이방의 환경에 나를 노출시키고, 낯선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능동적으로 반응하기로 선택하는 일이다. 여정의 공간과 시간을 통해 스며드는 색다른 시선으로 자신을 초청하는 일이다. 하여, 매우 평범하고 소소한 에피소드라고 할지라도 여행자의 사고의 폭과 깊이에 영향을 미치는 이벤트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고가 조금이라도 더 유연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여행을 떠나야 제대로 영양가 있는 활동이 되리라고 믿었다. 여행이 삶의 가치를 새로이 정의해주는 유의미한 시간대, 일대 일생의 타이밍은 분명 존재한다고 말이다.
열일곱 살 여름, 폭풍우 속에 페리를 타고 일본 자전거 여행길에 올랐고, 난생처음 한국을 떠나 경험한 이웃나라 여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어찌어찌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본 셈이 되었다. 어릴 때, 엄마가 사준 지구본을 수도 없이 돌리며,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일본에 가고 싶어 일본어를 공부하고, 미국에 가고 싶어 영어를 공부했다. 학창 시절 세계지리 수업을 듣다가 피아노를 전공하는 친구에게 '너는 이탈리아, 나는 그리스나 이스라엘로 유학을 가자'며 막연한 꿈을 나누었고, 언젠가 반드시 가보리라 했던 막연한 생각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정신세계가 너무나 궁금했다. 대학 2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기숙사 보증금을 털어 이스라엘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전공 공부에 한창 열을 올려야 할 시기에 캠퍼스를 떠나 이스라엘과 터키를 여행했다. 7개월 간의 긴 여정이었다.
스물한 살 순진하기만 했던 동양인 여대생은 지구 반대편의 중동 땅에서 세계 각지로부터 모여든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했다. 삶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서 여성이라는 타이틀이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체험했고, 배웠다.
결국,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다채로워질 수도, 단조로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오롯이 내 선택의 결과로 따라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학생활을 잠시 접어 두고, 내 나라를 아무 대책 없이 떠난 스물한 살의 무모한 패기가 밝혀 보여준 국경 너머의 진실이자, 하루하루 몸으로 부대끼며 느끼고 경험한 앎이었다. 글자로 배운 지식과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 한국사회 안에서 통용되는 성공의 콘셉트를 내 인생 사전에서 지웠다. 내 삶이 사회의 시선,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설령 그 기준이 친가족이 기대하는 바라고 해도, 내 삶의 잣대는 내가 스스로 부여한 가치를 기초로 세워진 것이어야 한다. 내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그네들의 생각일 뿐,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세운 기준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타인과 사회의 결재는 필요 없다. 성인이 된 직후, 지구 반대편에서 얻은 결론이었다.
여행 이후, 학부 전공을 국제학으로 변경했다. 한국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만들려면 국제적 이슈를 다루는 전공이 적합할 것 같았다. 다행히 부모님은 나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셨다. 그러리라 예상했던 바였다. 내가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분들이었다면, 폭탄 테러가 수시로 일어나는 중동의 화약고에 잘 다녀오라며 배웅하는 일은 애초에 없었겠지.
첫 직장에서 국제 행사를 치르는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각양각색의 배경을 가진 외국인, 해외 교포들과 일하는 경험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글로벌 노매드의 삶이 시작되었다.
중국, 일본, 라오스,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 네팔, 우간다, 탄자니아, 미국, 캐나다, 영국, 웨일스, 스페인, 이탈리아, 이스라엘, 터키에 이르기까지, 출장 혹은 여행으로 잠시 들르기도 했고, 같은 나라에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수년, 영국, 이스라엘에서는 수개월을 머물러 살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특별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곳에서의 일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항상 더 다이내믹했다.
1999년부터 코로나로 각 나라의 국경이 닫히기 시작한 2019년까지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교제하며, 나의 세계를 만들어 왔다. 새로운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이전 나라에서 만들어 놓은 나만의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다시 세웠다. 부분적으로 허물었고, 보수하여 다시 확장하고, 단단히 만드는 일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어느새 스무 해 긴 시간이 쌓였다.
내 나라 안에서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잠시 미루어 두고, 나라 밖으로 모험을 강행한 과거의 결정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철부지 스무 살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분명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아니, 7개월에서 여행을 멈추는 게 아니라 1년을 채우고 돌아오겠지.
혹여 누군가 '해외 경험이 많다는 사실이 당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느냐', '그래서 네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그렇다’, 혹은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 대신에,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려 줄 것이다.
애초에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하거나,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위한 스펙을 쌓으려고 외국행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삶은 이야기로 전해지고, 기억되어 남는다. 이야깃거리가 없는 삶은, 그리하여 공허하고, 쉬이 잊힌다.
지난 여행지를 하나씩 다시 떠올리며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직 풀어놓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와 기억과 에피소드가 내 삶에 가득하고, 이 모든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수많은 인연들과 지금까지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있으니, 썩 괜찮은 삶을 살고 있구나 싶다.
이제 공간과 시간과 인연이 함께 어우러져 담아낸 지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 다시 기억해주려 한다.
<여행 로그>
1999 일본
2003 - 2004 이스라엘, 터키
2008 미국
2009 - 2013 미국
2009 영국, 웨일스, 터키
2010 영국, 웨일스
2011 영국, 웨일스, 터키
2013 영국, 이탈리아
2014 라오스
2015 네팔, 우간다, 탄자니아
2016 네팔, 캐나다
2017 중국,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
2018 중국
2019 영국, 웨일스, 스페인, 이스라엘, 미국
과거의 기억을 방문하는 여행, 몹시 반가운 여정이 다시 시작될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