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찻집 주인장 Jun 29. 2021

꽁(空) 돈의 무게

기부 프로젝트 비하인드 스토리

19년 봄, 잠시 뉴욕에 다녀왔다. 고층 빌딩들이 빼곡한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 숲을 사이를 걷고 걸어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에 들어섰다. 주변의 빌딩들을 병풍 삼아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잠시 공원을 둘러보다 옆 뉴욕 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으로 발길을 돌렸다.


뉴욕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k Library) 열람실, 뉴욕 맨해튼, 2019.


대학원 유학 시절, 이곳 도서관 열람실 한편에 앉아 설렜던 기억이 났다. 여중생 때부터 막연하게 꿈꾸었던 유학생활의 실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단했고, 외로웠다. 이방인의 삶에 지친 마음을 달래 보려 20불짜리 심야버스에 몸을 싣고 뉴욕 맨해튼에 도착해 처음 들어가 본 건물이 바로 이곳이었다. 화려한 뉴욕 도심 안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도서관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머물렀었다.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도서관 내부를 구경하며 걷다가 복도 끝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도서관 기부펀드 현판이 새겨진 벽을 마주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었다.


뉴욕 공립도서관 기부펀드 현판, 뉴욕 맨해튼, 2019.


한참 동안 현판에 새겨진 기부펀드명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100개가 훌쩍 넘는 펀드명은 대개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었고, 그 이름 하나하나는 오래전 내게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주셨던 어른을 떠올리게 했다.


어릴 때, 동네 작은 교회에 다녔다. 난 예배에도, 교회 봉사에도 제법 착실한 '착한 학생'이었다. 하루는 예배당 앞을 지나는데 교회 어른들이 나를 부르셨다. 장로님 부부셨다. 장로님은 평소에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생각했다. 콩닥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다가섰는데 대뜸 공부 열심히 하라시며 봉투를 하나 쥐어 주셨다. 무뚝뚝한 분인 줄로만 알았던 장로님이 온화하게 웃는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 바라보시며 '책 값이다' 하셨다. 이후로 오랫동안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5 원씩 ' ' 받았다. 십 대 청소년에게 5 원은 지금도  금액인데, 20년도  ,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꼬박 3년 동안 책을 살 용돈을 받았다.


당시에는 장로님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좋은 일을 하시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감사한 마음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그때의  어르신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소녀가 아무리 기특해 보인다 해도 자신의 지갑을 선뜻 열어 수 년 동안 용돈을 준다는 것은 절대 마음만으로는   없는 일이었을 터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서 내 시간과 노력으로 처음 번 돈, 월급을 받아 들고 나서야 누군가의 돈을 공(空)으로 받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알게 됐다.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기며 받았던 5만 원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 건 진짜 어른이 되고 나서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내내 마음의 빚을 품고 지냈다. 내가 받은 액수대로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장로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고 장례식 이후 아내분을 통해 장로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듣게 되었다.


"우리 장로님은 학생들을 그렇게 예뻐라 하는 분이시라 말없이, 소리 소문 없이 학생들 여럿 도와주셨어. 나는 우리 장로님 존경해. 다른 곳에도 티 내지 않고 좋은 일 참 많이 하는 양반이었는데... 장로님이 우리 00이(글쓴이)가 공부 열심히 잘해서 앞으로 세계를 다니며 좋은 일 많이 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고 하셨어."


아내에게 존경받는 멋진 어른에게 사랑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좋은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쉽고 안타까웠지만, 그러므로 더더욱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언젠가 베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면 내가 받았던 것처럼 '책 값'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브라이언트 공원 (Bryant Park), 뉴욕 맨해튼, 2019.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소녀시절, 감사하게도 난 좋은 어른을 만났고, 덕분에 진짜 어른, 좋은 어른은 응당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고,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다.


뉴욕의 공원 한가운데 앉아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웃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때의 다짐을 되뇌었다. 철부지 시절 당연한 듯 누렸던 꽁돈의 무게를 잊지 말자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꺼이 키다리 언니가 되어 주자고. 나의 후배들에게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누릴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작은 부분이라도 나누어 주자고.  






사진첩에 담긴 뉴욕에서의 추억을 하나식 꺼내어 본다. 오래전 시작된 기부펀드의 꿈과 그 꿈을 만들어 주신 좋은 어른과의 인연, 그리고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달려온 그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리고 티(tea) 나는 프로젝트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오랜 꿈의 출발이었다.


티(tea) 나는 프로젝트 참여 홍보 카드뉴스 중 일부, 2020.


작가의 이전글 별안간 프로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