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관리 vs 시간 관리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자꾸 미루게 될 때가 있다.
머리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왠지 '손에 너무 안 잡힐 때' 그래서 스트레스만 더 쌓여가고, 스트레스가 쌓여가니 내 시스템은 더 마비가 되어갈 때.
이런 상태를 우리는 흔히 '미루는 행동'이라고 한다.
심리상담 장면에서도 우울증이나 불안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흔히 해야 할 일들을 제 때 제 때 못 끝내는, 혹은 시작도 못하는 '미루는 행동'으로 기능에 영향을 받고 (공부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돼서) 그것으로 인해 더 불안과 우울함을 경험하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럴 때 흔히들 생각하는 방법들 또는 흔히 듣는 조언들은 '시간 관리' 또는 '행동 관리'이다.
심리학에서도 미루기 행동을 고치는데 '인지행동치료'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은 접근법을 쓴다.
-생각: 미루는 행동을 일으키는 '생각' 살펴보고, 바꾸기
-마음/기분: 마음 차분하게 다스리는 활동들 하기 도움 되는 행동하기
-행동: 미루는 행동을 없앨 수 있는 도움 되는 행동들 하기
이 '행동' 부분이 특히 우리가 미루는 행동에 대해 쉽게 듣게 되는 '조언'들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
-해야 할 일 목록 만들고, 그중 우선순위를 두고, 현실적으로 데드라인이 가능할 때/지켜야 하는 데드라인에 따라 우선순위 만들기.
-끝내야 할 프로젝트를 작은 단계들로 나누어 그 작은 소 목표 하나에만 우선 집중하기.
-현실적으로 이 일을 끝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계획 세우기.
-내가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기 또는 가장 하기 싫은 일부터 하기.
-우선 5분만 해본다는 생각으로, 어쨌든 시작하기.
-책상에 실제 앉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을 할당해서 그 목표만 채우기 - 더 하고 싶어도 안 하게. 30분만 (반항 심리 이용)
-하루 중 가장 내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타이밍을 찾아 그때 꼭 해야 하는 일들을 할 스케줄 정하기.
-내가 일이 가장 효율적으로 되는 장소를 정하기.
-이 일을 끝내면 스스로에게 보상해 줄 것 찾기.
문제는, 우리의 행동/마음/패턴/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할 때 많은 경우
“말이 쉽지, 실제 적용은 어려워요" =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의 반응이 나오게 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가 뭘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저 '도움이 된다고 하는 방법'들조차 시도하기 힘들고, 내 온몸과 마음이 저항할 때이다.
도움 되는 방법들은 알겠는데, 그런 방법들을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면 더 절망감이 몰려오게 된다.
'나는 가망이 없다.'라는 자신에 대한 자책, 희망 없음 등등 나를 추가로 더 아프게 하는 마음들과 생각들이 패키지도 몰려오게 된다.
서론이 길었고, 내가 요즘 한동안 이 상태를 경험했다.
대학원 강의, 상담수련생들 슈퍼비전은 내가 항상 꿈꾸던 시도 해보고 싶은 분야였고, 새로운 기회들이 찾아와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나는 예상과는 다르게 효율적으로 으쌰으쌰 에너지가 넘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꾸 해야 할 일들을 미루기 시작했다.
‘아 일해야 하는데, 손에 안 잡힌다. 왜 이러지’
스멀스멀 부담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 흔들림부터 시작해서, 익숙하게 하던 일이 아니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고, 준비하고, 운영해 나갈지 감이 안 와 더 손을 못 대겠는 기분. 막막함.
그래서 '미루기의 악순환'에 빠졌다.
내 머릿속은 한동안 이랬다.
“할 일은 많은데, 일이 손에 안 잡힌다' -> 스트레스가 쌓였다. '큰일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망하는데..' 등등 -> '스트레스가 쌓이니 마음이 안 좋아서 더 일할 상태에서 멀어진다 - 일을 하려면 머리 에너지도 마음 에너지도 어느 정도 있어야 되는데, 내 스트레스가 내 정신 에너지를 더 고갈시킨다' -> 더 스트레스받는다. -> 할 일은 많고, 데드라인은 더 가까워져 오는데, 나는 더 위기 상황에 빠진 느낌이 든다.” 그리고 또 도돌이표.
위에서 언급한 잘 알려진 '도움 되는 행동'들에도 내 온 시스템은 저항했다. 그러다 발등의 불이 '정말' 떨어졌고,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지행동치료의 '행동' 방법은 안 먹히니, '생각'과 '마음' 접근법을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생각 살피기: 내 미룸 행동을 초래하고 있는 나의 자동 생각들이 다음과 같이 포착되었다.
“일을 하려면 '열정'이 있어야만 한다. 순수하게 일을 하고 싶은 열정과 동기가 있어야 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
이 나의 굳은 믿음/자동생각들을 포착한 후에는 그것들을 거리를 두고 들여다봤다. 그리고 순수한 궁금증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 시작했다.
더 도움이 되는 생각으로 대처해 본 것:
“진짜? 일을 하려면 항상 막 일이 미치도록 하고 싶을 만큼 열정이 있어야 돼? 일은 일이야. 일은 하기 싫어도 해야 될 때가 있어. 꼭 항상 열정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필요는 없어. 일 해야 되니까 그냥 해야 할 때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
-부담감, 자신감 없음: 새로운 일들을 막상 시작했는데 이
일들이 익숙하지 않으니 내가 막상 잘 못해낼까 봐 두려웠다.
막상 시작했는데 나의 유능하지 않음을 마주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면 나는 엄청 스트레스받을 텐데. 나의 부족함/실패를 마주할 때 내가 스트레스받고, 내가 그 스트레스를 잘 대처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 더 도움이 되는 생각:
“해보고 안되면 말고. 그래서 세상 안 망해. 일 안 하고 있는 지금이 더 스트레스다.. 차라리 일을 시작해 보고 그다음에 내 똥멍청이/부족함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듯.”
이렇게 '생각 작업'을 하니 신기하게 마음의 압도감, 짓눌림이 좀 줄어들었고, 스트레스가 조금 덜해져 '행동 작업'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시도한 '행동 작업'은
-One thing at a time: 한 번에 하나만 생각하기. 길고 긴, 그리고 매일 더해지는 To do List에서 지금 가장 급박하고, 시간과 에너지가 오래 걸릴 것 같고, 중요한 것 하나를 정해, 오늘 하루는, 다른 것들에는 우선 신경을 끄고, 그 프로젝트 하나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꿈쩍을 안 하던 내 몸과 마음이 억지로라도 움직여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시스템의 저항이 덜해졌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강의계획서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하나의 큰 프로젝트가 내 To-do-list에서 지워지니,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급하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골라, 그다음 날은 그 프로젝트에만 의도적으로 집중했다.
이렇게 내 마음이 스트레스/할 일들에 대한 압박감으로 가득 찬 물 바가지에서 하루에 물을 한 컵 씩 빼내는데만 집중했다.
그리고 추가로 스트레스/압박감 조절을 위해,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또 갑자기 스트레스가 올라올 때 가만히 앉아서 '해야 되는데 해야 되는데' 하며 더 에너지를 소진하는 대신, 그 '조기 경고 신호- Early Warning Signs'들 (스트레스 스물스물 올라오는 느낌)이 올라올 때마다 집안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 빨래 돌리기, 널기, 개기, 설거지, 청소기 중 하고 싶은 것. 그러다 보니 몸이 움직이고, 정신이 맑아져, 내 시스템이 일을 하기에 적합한 모드가 되었다.
아직도 내 스트레스 바가지에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압도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종종 찾아오지만 그럴 때마다 의도적으로 나에게 압도감을 주는 내 자동생각패턴/신념을 체크하고, 내 생각들에 질문해 보고, 그 경직된 생각들을 좀 더 유동적으로 만들어주고, 나의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해보면서 ‘마음조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고 있다.
To-do list의 목록들 자체에 스트레스와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직된 생각들로 인해 추가로 더 더해지는 압박감은 막을 수 있어 최소한 마비가 되는 상태, 미루기 사이클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구 다행이다.
바쁠 때는 마음 관리를 잘하자! 가 요즘 나의 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