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기분_1
도깨비 여행이라는 말이 있다.
도깨비마냥 까꿍- 하고 나타났다 재빨리 사라지는 짧은 여행의 모양새를 일컫는 표현이다.
홍콩이 딱 도깨비 여행에 적합한 곳이란 이야길 많이 들었다. 밤사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까꿍- 하고 하루 즘 구경하고 오기에 딱이라는 둥, 구경할 게 없으니 하루도 넘친다는 둥, 쇼핑만 하는 곳이니 반나절이면 충분하다는 둥. 제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어쨌든 홍콩은 도깨비 여행에 최적화 된 도시랬다.
귀동냥으로 들은 홍콩을 생각하며 나 역시 가볍게 2박 4일의 도깨비 여행을 계획했다. 2박 4일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정확히는 금요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가 홍콩에서 두 밤을 자고 월요일 새벽 돌아오는 일정이었으니 그냥 2박 4일이라 해 두겠다.
금요일 저녁. 부랴부랴 한 주의 일을 마무리 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한 시간 가량 공항철도를 타고 가니 인천에 닿았다. 지하철에서 몇몇 여행객들이 나의 부러움을 샀다. 이유는 그들이 큰 케리어를 의자 삼아 그 위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만원 지하철에서 기댈 곳이 있는 게 첫 번째 부러움이었고, 짐의 양으로 추측컨데 꽤나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 두 번째 부러움이었다. 애니웨이.
난 도깨비 여행객답게 달랑 백팩 하나를 들고 갔다. 짐을 부칠 필요도 찾을 필요도 없는 홀가분함이 좋았다. 물론 큰 캐리어를 아둥바둥 끌고와 티케팅 카운터 레일 위에 던져버리는 쾌감에는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홍콩행 비행기는 쉬이 연착되곤 하는데, 홍콩이 초행이거나 아직 홍콩을 가보지 않은 분들은 참고하면 좋을 듯 하다. 일이 있어 체크인을 조금 늦게 했더라도 홍콩행 비행기는 떠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연착을 염두하고 설렁설렁 나온다면 비행기가 제 시간에 출발해 곤욕스러울 수 있다. 머피의 법칙.
홍콩까지는 이륙 후 약 세시간이 소요됐다. 홍콩과 서울의 시차는 한 시간으로, 홍콩의 시간이 한국보다 한 시간 늦다.
밤 11시즘 이륙한 비행기는 홍콩시간으로 다음날 새벽 1시에 홍콩공항에 떨어졌다. 고작 세시간의 비행이었지만 괜히 피곤함이 몰려왔다. 자리도 나쁘지 않았는데 그냥 좀. 찌뿌둥-
나 처럼 덩치가 있는 사람은 저가항공 이용시 옆좌석 또는 비상구석을 구매하며 보다 편한 여행을 즐길 필요가 있다. 한 번은 다이어트에 성공한 몸뚱이를 맹신해 일반석에 앉았다가 무릎이 성하지 못 했던 적이 있다. 이후론 가능하면 비상구 좌석을 구매한다. 덕분에 한두끼를 빈약하게 먹더라고 그게 좋다.
홍콩 국제공항의 또 다른 이름은 '첵랍콕 공항'이다. 홍콩은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의 이름이 첵랍콕 섬이다. 쉬이 예상할 수 있는 레파토리지만 공항이 거기 있어 첵랍콕 공항이다. 홍콩공항이라 불러도 좋지만 난 꼭 그곳을 첵랍콕 공항이라 부른다. 3자 가운데 어느하나 발음하기에 호락호락 한 것이 없다. 그래서 그렇게 부른다.
첵. 랍. 콕!
이른 새벽 도착한 첵랍콕 공항. 사실 홍콩이 밤도깨비 여행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 새벽임을 잊게 하는 어떤 불야성을 기대했었다. 그런데 첵랍콕의 새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산했다.
침사추이까지 꽤 먼길이 될 것 같기도하고, 늦은 시간에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보니 배가 고팠다. 다행히 첵랍콕에는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는 세븐일레븐이 있었다. 난 늘 다른 나라에 가면 슈퍼나 편의점에서 이국성을 느끼곤 하는데, 홍콩에선 이 세븐일레븐이 그랬다. 진열대에 놓인 국적불명의 빵들과 냉장고에 자리한 홍콩에서만 볼 수 있는 음료들.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꿈과 모험의 나라 홍콩에 온걸 환영해!"
공항에서 침사추이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N21 심야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는 것. 초행길에 택시를 타면 바가지 쓴다는 이야길 많이 들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심야버스를 택했다(초행이 아니면 정말 정가에 갈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다).
2층 버스였다. 영국에서 탔던 2층버스가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홍콩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음이 와닿았다. 내가 탄 정류장에선 대부분의 탑승객이 나와 같은 관광객이었다. 버스는 침사추이로 직행하지 않았다. 사실 직행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 버스가 너무 돌아가니 조금의 배신감을 느꼈다. 이게 공항버스라니.
N21버스는 첵랍콕 공항 안을 쭉- 한 번 순환했다. 그러는 동안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그들은 짐작컨데 대부분이 공항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었다. 요리사 복장을 한 세명의 아랍인도 있었고, 홍콩인터네셔널에어포트가 세겨진 팀복 따위를 입은 무리도 있었다. 미화 노동자도 있어고 사무직처럼 보이는 사내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떠나왔는데, 그 시간 그 버스엔 누구보다 삶에- 생계에- 일상에- 발 붙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에겐 이 길이 그저 또 한 번의 퇴근길이었을 것이다.
차창 밖 생경한 풍경을 설렘으로 감상하는 자는 나뿐이었으리라. 괜히 특별해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이런 식의 의미화는 내 살아가는 원동력이기에.
애잔한 낭만이 흐르는 새벽의 다리를 건너.
버스는 침사추이에 도착했다.
end.
* 별로지만 사진은 직접 찍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