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1
* 일기 아니고 소설입니다.
책을 읽다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방안이 환했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라 이정도의 밝기라면...큰일났다! 지각이야!
헐레벌떡 일어나는데, 뭔가 이상했다. 리젠시 양식으로 한껏 치장된 그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앙증맞은 러버덕 패턴의 침구는 간 데 없고, 살구색 장미가 정교하게 수놓인 쇼파 위에서 눈을 떴다. 정면에 보이는 거울 속 내 모습은 분명 나인데, 머리모양도 입은 모양새도 내가 어젯밤 읽다 잠든 <엠마>에 등장하는 19세기 영국 귀족 미혼여성의 묘사 그대로였다. 똑똑-노크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리즈 아가씨, 마님께서 응접실로 오라십니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듣기로는 영어로 말하는 소리였는데 마치 영화 자막을 읽는 것처럼 머릿 속에서는 또렷하게 한국어로 해석되어서 들렸다. 그건 그렇고, 리즈 아가씨? 누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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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둥절 하는 사이 눈을 한 번 깜빡 한 것 같은데 나는 어느 새 사람들로 가득찬 응접실 문을 열고 서있었다. 모두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었고 모두 현대의 옷차림은 아니었다. 뭐지? <서프라이즈> 촬영장인가?
"그건 그렇고, 미스터 노블리는 도대체 누가 초대한 거죠? "
"이번 모임에 따로 초대한 건 아니에요. 우리 시아버님 심부름으로 온 모양이에요. 내일 아침엔 떠날테니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대화를 이끌고 있는 건 백발의 귀부인. 그 주위로는 우리 엄마 또래로 보이는 후덕한 아줌마 세 명이 앉아서 귀부인의 말에 이러쿵 저러쿵 대꾸해주고 있었다. 나를 부르던 목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자막을 읽는 것처럼 이해되는 영어'로 대화중이었다. 두 명의 젊은 남자는 창가에 서서 농담을 주고 받는지 웃고 있었고, 두 명의 나이 든 남자는 구석의 티테이블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제서야 이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리즈가 왔군요! 어서 들어와요."
노부인이 나를 알은 체 하며 손짓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 있는데 노부인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중년부인이 "뭐하니 리즈? 어서 오지 않고."라고 꾸중하듯 나를 불렀다. '뭐하니? 어서 씻지 않고.' '뭐하니? 어서 일어나지 않고.' '뭐하니? 어서... 하지 않고.' 저건 우리 엄마 말버릇인데, 꿈에서까지 저걸 듣는구나. "우리 애가 아직 모자란 점이 많아서..."라고 입을 가리며 웃는 것까지 엄마 그 자체였다.
"그런 말씀 마세요. 엘리자베스는 훌륭한 아가씨예요."
"맞아요, 너무 겸손하시네요. 얼굴도 예쁘고 자태도 고운데... 아, 피아노연주도 수준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엄마(?)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피부가 노란 중년부인의 말에 노부인과 중년부인들, 젊은 남자와 노신사 모두의 시선이 응접실 한귀퉁이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로 쏠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곡 청해 들어도 될까요?"
창가에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그 남자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은근히 피어올랐다.
"그래, 리즈. 웨스턴 씨에게 한곡 들려드리렴."
나는 떠밀리 듯 그랜드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이것이 꿈이라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악몽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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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7년간 피아노를 쳤었다. 체조, 수영, 발레, 미술, 서예, 바둑... 온갖 예체능을 내게 주입하던 엄마가 그 모든 것들에서 나의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피아노였다. 역시 내게 재능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엄마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피아노는 꾸준히 치다보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고, 엄마의 허영을 채울만한 조그마한 대회에서 입상을 할 수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지, 실크와 레이스로 치장된 하얀 드레스를 입고 무슨 콩쿨이었는지 그래도 제법 큰 무대 위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했던 기억이 있다. 3위인가 상을 탔던 것 같은데 그때만큼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초등 저학년부 3위'였으니까, 거의 참가상에 가까웠던 것 같다. 장장 세 달을 연습한 곡이어서 아직도 첫 소절 몇 마디는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곡이 뭐였더라... 그래,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연음으로 부드럽게 시작하고 바닥의 페달을 밟고... 그 다음엔...
그 다음이 기억날 턱이 있나, 그게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인데. 결국 연음과 페달 밟기만 반복하며 버벅대는 내게 엄마는 '뭐하니? 어서 제대로 치지 않고.'라고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그날도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종업식을 한 날이어서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엄마가 동네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엄마가 손씻고 와서 피아노를 좀 쳐보라고 했다. 우리 애가 다른 건 다 그저 그런데 피아노는 제법 쳐. 그때도 칭찬과 후려치기를 동시에 했었지.
거실 한 켠 장식품처럼 놓인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사실 피아노에 흥미를 잃은지는 오래되어서 집에서는 거의 연주할 일도 없었다. 고학년이 되고 나선 엄마의 욕심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피아노 레슨도 그만두기 직전이었다. 뭘 쳐야 할까... 슈만? 쇼팽? 모차르트? 그런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흥미는 잃었지만 기계처럼 매일 같이 연습해왔던 곡들인데 그 어떤 곡도 첫음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엄마 입에서 '뭐하'까지 튀어나왔을 때, 내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연주하기 시작한 곡은 <과수원 길>이었다. 음악선생님이 내게 반주를 해보라며 수업시간에 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걸 갑자기 왜 연주한 건지 아직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손가락에 부스터를 달고 연주하는 것처럼 화려한 소네트 같은 걸 기대했던 아줌마들은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지 당황하더니 곧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려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러줬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아줌마들의 박수소리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뭐라고 할 지, 아줌마들은 또 뭐라고 맞장구쳐줄 지 듣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이불을 덮어쓰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잠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첫 날. 나는 더이상 피아노 레슨을 가지 않게 되었고, 대신 특목고 입시 대비 종합반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엄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쓸모 없고 형편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딸인지, 나의 모자람에 대해 우리 엄마만큼 잘 아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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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처럼, 오늘도 버벅이고 있다. 결국 <과수원 길>...을 쳐야 할까. 그럼 이 악몽에서 깰 수 있을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데 딸깍-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쏠려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응접실 입구를 향했다.
"아... 실례합니다."
"아, 미스터 노블리."
용인발음이 뚜렷한 노부인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렸다. 불청객...이었구나, 저 사람. 아, 그런데 저 사람? 범형태 씨? 저 사람이 저기서 왜 나와?
어정쩡한 자세로 응접실 문을 열고 안을 보던 범형태 씨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이내 응접실 문을 열고 머쓱하게 들어왔다. 노부인과 중년부인들, 젊은 신사와 노신사들이 소리 없이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폭이 넓고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범형태 씨가 내게 다가왔다. 짧게 깎은 검은 머리, 대춧빛의 얼굴,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까지 이어진 듬성듬성한 턱수염. 젊은 신사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서양식 옷차림이 낯설었지만 분명 내가 아는 그 남자였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일하는 개발자. 소개팅에서 삼국지 얘기를 하는 고지식한 남자.
"이거 혹시 꿈인가요?"
범형태 씨가 내게 말했다. 이건 또렷한 한국어였다. 그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왔고, 내 귀로 한국어가 흘러들어왔다.
"네... 아마도... 제...꿈인 거 같은데요?"
내 대답에 범형태 씨의 당혹감은 더 짙어진 듯 했다.
"제...꿈...인 줄 알았는데요."
"미스터 노블리, 지금 모두 리즈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자니 젊은 신사 중 한 사람-애초에 나를 이 곤경에 빠뜨린 웨스턴 씨?-이 말했다.
"지금 저거 영어로 들리죠?"
범형태 씨가 손을 뻗어 웨스턴 씨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그런데 한국어로 이해되요."
"어디 감히! 손가락질을!"
범형태 씨의 행동에 웨스턴 씨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범형태 씨는 얼른 손을 내리고 '아, 죄송'이라며 허리를 굽혔다. 그거 좀 한국식인 거 같은데요...
"미스터 노블리, 용무를 마쳤다면, 죄송하지만 방으로 돌아가주시겠어요? 이 자리는 제 개인적인 모임이라 노블리 씨를 다들 좀 불편해하는군요."
노부인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범형태 씨에게 말했다. 어쩐지 따돌림 당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쓰러워졌다. 이 사람이 내 꿈에 등장한 이유도 있을테고...아니, 내가 범형태 씨 꿈에 등장했다고 했나?
"죄송하지만 레이디. 노블리 씨가 제 연주까지만 듣고 갈 수 있게 해주시겠어요?"
완벽한 영어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입에서는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용케 다들 그걸 알아듣는 듯 했다. 엄마(?)는 당황했고 노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그래요, 그럼.'하고 대답했다. 노블리 씨, 아니, 범형태 씨도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듯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피아노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피아노도 칠 줄 알아요?"하고 물었다.
"아뇨. 아니, 칠 줄 알았는데... 지금은 하나도 못 쳐요. 그런데 쳐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 한 곡 치긴 칠 건데..."
횡설수설하며 식은땀을 흘리는 나를 보며 범형태 씨는 내가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무슨 곡을 칠 건데요?"
"...과수원길...이요."
"...동구밖 과수원 길...그거?"
"네... 그거."
우리가 속닥거리자 엄마(?)가 헛기침을 했다. 어서 연주나 하라는 뜻이겠지. 15년 전 그때처럼 아줌마들의 합창을 기대할 수도 없는데 과연 나는 무사히 연주를 마칠 수 있을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건반을 눌렀다.
그 순간,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내 연주에 함께 따라붙었다. 화들짝 놀라 옆을 올려다보니 어느 새 범형태 씨가 허리를 바로 세우고 서서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내가 말없이 범형태 씨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니 범형태 씨는 어서 연주하라며 손짓했다. 나도 심호흡을 하고 다시 건반을 눌렀다. 단순하지만 조악하지 않은 친근한 멜로디를 따라 단단하고 섬세한 베이스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노부인도, 중년부인들도, 노신사들도 어느 새 눈을 감고 범형태 씨의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불편한 기색인 건 웨스턴 씨 뿐인 듯 했다. 나는 손가락에 더욱 기운을 불어넣고 그의 목소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 더 다채롭고 화려하게 그의 뒤를 받쳐주었다.
짧은 반주를 하는 동안 그제야 창밖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따스한 오후의 햇살이 비치는 녹색 잔디. 영원처럼 길게 이어지는 노랫소리. 연주를 마치고 이 남자의 손을 잡고 저 잔디밭을 걷고 싶다-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하는 생각도. 이것이 나의 꿈 속이든, 그의 꿈 속이든. 더 이상 악몽은 아닌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