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병찬 Sep 16. 2020

아이와 함께 영어 원서 읽기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이번 기회에 아이와 영어공부를 해보려는 분들이 적지 않으실 거라 예상됩니다. 혹시 이런 분들께 제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아이와 영어원서를 읽으면서 느끼고 깨달은 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물론 딸과의 추억(이라고 쓰고 "악몽"이라고 읽는다)을 기록해 두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1. 영어원서를 읽게 된 계기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이고,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 반 정도 지났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가끔 뭘 물어봐도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어서 최근까지 딸의 영어 실력을 알아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맞벌이로 두 아이를 키우다보니 기본적인 육아와 살림만으로도 힘에 부쳐 아이들의 공부까지 챙기지 못한 측면도 있고요.

딸과 영어 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2019년 겨울방학 때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방학 동안 아이를 하루 종일 집에 방치할 수 없으니, 일주일에 두 번씩 학원에서 진행되는 방학특강에 보내겠다고 했고, 저도 아내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특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숙제를 해야한다며 자기 방에 들어간 딸이 펑펑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숙제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못하겠다는 겁니다. 숙제는 2쪽 분량의 텍스트를 읽고 관련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었는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수능 난이도를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초등학교 5학년한테 이런 숙제를 내주는 건지 의아했지만, 어찌됐건 학원을 갑자기 그만둘 수도 없으니 제가 옆에서 하나하나 내용을 가르치며 숙제를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딸은 저랑 공부하는 게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아빠의 도움이 없으면 숙제를 해 갈 방법이 없으니 싫어도 꼼짝 없이 저한테 배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던 중 대구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폭증했고, 영어 학원은 수강료를 환불하고 방학특강을 중단했습니다. 아이는 만세를 불렀지만 제가 가르치지 않으면 영어 공부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죠. 학원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다가 결국 아이와 영어 원서를 읽어보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2. 원서의 선택

아이와 영어 원서를 함께 읽으려면 책을 잘 선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단 고르고 나면,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같은 책을 봐야하는데,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원서를 읽는 고통이 배가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의 취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저같은 경우 다음과 같은 점들을 함께 고려했습니다.

우선 저에게도 흥미로운 책을 골랐습니다. 지나치게 아이들 중심의 소재를 다룬 책들은 장기간 가르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아빠도 그런 소재를 좋아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요.

다음으로 너무 얇은 책도 피했습니다. 제가 영어원서를 함께 읽으면서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는 꾸준히 읽으면 두꺼운 영어책도 결국은 완독할 수 있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얇은 책을 고르게 되면 아이가 이런 교훈을 깨닫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이런 나름의 기준에 따라 후보군에 올라왔던 책은 "Number the Stars(별을 헤아리며)", "Animal Farm(동물농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사자와 마녀와 옷장)" 등이었는데 결국에는 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The Giver(기억전달자)"가 선택되었습니다.      


3. 원서와 사전의 구매

원서를 구매하실 때는 반드시 같은 책을 두 권 구매하실 것을 추천합니다. 외국에서 발간한 페이퍼 북은 저렴해서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을뿐더러, 페이퍼 북은 글씨가 크지 않아서 아이와 같이 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서를 구매하실 때는 종이사전도 함께 구매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요즘에는 대부분 인터넷 사전을 사용하기 때문에 종이사전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롱맨 영영한 사전을 구매해서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이에게 찾아보도록 시켰습니다.

종이 사전의 장점은 크게 2가지인데, 첫째는 영어공부를 하는 동안 태블릿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로부터 아이의 눈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종이 사전의 경우 공부의 흔적을 남기기가 쉽다는 겁니다.

딸은 사전을 찾는 걸 엄청 귀찮아했는데, 단어를 찾을 때마다 연필로 표시를 하게 해서 지금 찾는 단어가 예전에도 찾아봤던 단어임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이가 같은 단어를 다시 찾을 때는 "사전 찾는 거 엄청 귀찮지? 하지만 네가 단어를 암기하지 않으면 이 귀찮은 걸 계속 반복해야 돼."라는 얄미운 조언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4. 오디오북의 활용

유튜브를 찾아보시면 책을 읽어주는 원어민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와 꼭 해당 챕터의 오디오북을 유튜브에서 찾아듣고 진도를 나갔는데, 리스닝 연습도 되고, 본문을 읽기 전에 해당 챕터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서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5. 구체적인 수업방법

우선 매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오디오북을 들었습니다. 오디오북을 듣고 나면 아이가 한 문장씩 읽고 해석을 하도록 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해석을 하기 전에 사전을 찾아보도록 했는데, 딸이 사전을 뒤지는 걸 너무 귀찮아해서 저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제가 사전을 찾고, 아이만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아이가 찾는 나름의 규칙을 정했습니다.

아이가 문장을 해석하는 걸 듣고, 아이가 '정확하게' 직역을 하는지 확인한 다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확하게' 직역을 하도록 가르쳤는데, 저는 이 부분이 원서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을 조합해서 '대강' 해석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해석이 크게 틀리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하면, 문장이 조금만 복잡해지거나 길어져도 한계에 부딪히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조금 귀찮고, 힘들더라도 '정확한 해석의 원칙'을 지키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로 아이가 정확하게 해석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문장의 주어는 어디까지지?", "이 문장에서 that 이하는 뭘 수식하는 걸까?"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6. 공부 시간

저 같은 경우 하루에 총 3번, 한 번에 약 1시간씩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말이 1시간이지 아이가 냉장고를 뒤지고,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을 모두 포함한 시간입니다. 당시에는 학교도 학원도 완전히 수업을 멈춘 상태였고, 저도 일이 크게 줄어 가능했지만, 사실 하루에 3시간씩 아이를 가르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만 하루 학습량이 너무 적으면 완독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져 중도에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저도 아이와 2번째 원서를 읽다가 그런 이유로 수업을 중단하게 됐구요.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하루에 2시간 정도는 수업을 진행하실 것을 권장합니다.


7. 당근

일단 아이에게는 아빠가 학원선생님보다 훨씬 편한 존재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초등학생이 영어를 잘해야 하는 분명한 동기를 갖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요. 반면에 아빠와 하루에 3시간씩 영어공부를 한다는 건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완독을 조건으로 뭔가 큰 보상을 약속하는 편이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 아이가 웹툰과 그림을 엄청나게 좋아하고, 오래 전부터 아이패드 프로를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원서를 완독하면 아이패드를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아이가 짜증을 낼 때마다 아이패드가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다는 말로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선물이었던 것 같지만 아이를 책상에 앉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8. 원서 읽기를 통해 얻게 된 것들

아이를 가르치면서 아이의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소득인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아이를 학원에 보낸다고 해서 아이의 영어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도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이와의 추억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아이와 200페이지가 넘는 영어 원서를 함께 읽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아빠가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더욱이 원서 읽기는 아이 뿐만 아니라 저의 영어학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The giver" 이후로 "The bridges of Madison County"를 완독했고, 지금은 예전에 읽다가 그만 두었던 " The alchemist"를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으니까요.


9. 마치며

이렇게 정리해두고 보니 아이와의 원서 읽기가 무난히 진행된 것 같지만 사실은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특히 막판에는 저의 짜증과 딸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매일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걸 참고삼아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모쪼록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는 아빠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변호사 이병찬(제라드)



작가의 이전글 [단편소설] 유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