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13 ] 1987 (2017)
그렇게 오래지 않은 몇 년 전 광화문, 애인과 함께 참여한 집회에서 차벽을 끌어내기 위해 다함께 밧줄을 전경 버스 타이어에 묶고 당기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 손은 금방 부르텄고, 밧줄을 한번 당기기만 해도 내가 주는 힘과 주변 남자들이 주는 힘의 차이가 단번에 느껴졌다. 밧줄을 놓고 잠시 어수선할 때 애인에게 남자들이 당기는 게 낫겠다며 내 손수건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집회가 끝난 후 애인은 나를 보며 아까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었다. 차벽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남녀 모두가 함께 당기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냐. 나는 여자라서 약하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뒤에 빠져있겠다는 건 이 집회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리는 행동일 뿐이다. 다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애인의 말에 너무 부끄러워 지금도 그 순간이 잘 잊히지 않는다.
영화 <1987>에서 김태리가 연기한 ‘연희’는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인데, 그 이유는 실존인물들 가운데 감독의 창조가 가장 많이 들어간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도 있지만, 그보단 언제든 불의에 맞서고 민주주의에 투신할 각오가 된 남자들 속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흐름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자라서가 아닐까.
서울대 학생이 고문을 받다 죽었다는 사실에 비분강개하는 운동권. 보도지침을 과감하게 무시하며 끈질기게 사실조사에 매달리는 기자. 공안의 압박에 배짱으로 버티는 검찰. 마치 당연한 듯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이러한 흐름의 배경은 물론 1980년 광주 민주항쟁, 1986년 권인숙이 폭로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을 겪으며 쌓여온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영화 속에서 묘사된 남성들이 오직 한 가지 목표-진실을 밝히겠다는-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아요?”
반면 연희는 이런 움직임에 브레이크를 건다. 노조활동을 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체감한 운동권의 한계와 하수상한 시절에 더 이상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연희를 ‘운동권처럼 보이지 않는 대학생’으로 만든다. 후대의 평가가 완료된 실존인물과 달리 연희는 영화가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넘겨준 유일한 캐릭터인데, 그렇다 보니 <1987>이 개봉한 후 연희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영화에서 여성 운동권의 묘사가 충실했는지에 대해 관객의 의견이 엇갈린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운동권 속의 여성을 지웠거나 숨긴 것 같진 않다. 다만 영화가 말하려는 건 단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1987년 6월까지의 단편인데, 후대를 사는 우리가 1980년대를 기억하려면 그 이상의 도약이 필요했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중심인물은 아니었으나 영화에서 꾸준히 비춰준 ‘만화사랑’의 여자 운동권 선배, 가두시위에 행진하는 여성들. 그 정도면 됐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말하지 못할 건 뭔가. 또한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1987>의 의미는 지금 386 세대가 누렸던 남성 고학력자 운동권의 추억거리 혹은 훈장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할 건 뭔가.
<1987>은 한국 근대사인데 왜 관성처럼 젠더 평등을 찾느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운동권이 여성 동지를 대하는 시각엔 분명 젠더 간 온도차가 존재했다. 화염병을 던지고 거리를 행진하며 독재 타도를 외치는 것이 남성 운동가의 전형적인 이미지였다면, “청소하기, 밥하기, 후배들 챙기기, 물품 관리, 자료 정리, 조직 안에서 갈등하는 인간관계에 관여하고 조정하기 등이 이 시기 사회운동에 깊이 참여한 여성 활동가들에게 주어진 일이었다.”(<오빠는 필요없다>, 전희경, p.65, 도서출판 이매진)
여자는 체력이 약해서 오래 행진할 수 없다. 전경의 추적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감정적이라 일을 그르친다. 여차하면 보도블록을 뜯어 던질 힘도 없는, 오히려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다. 이런 편견이 만연했던 운동권에서 여성 운동가의 역할은 커피를 타거나 속옷 빨래를 해주는 등 주변부로 밀려났는데, 이 장벽을 타파하고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여성들이 택한 전략 중 하나엔 운동가 남자선배를 ‘오빠’가 아닌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됐다.
여성 동지가 운동권 내에서 요직에 앉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것은 운동권 내부에 상대적으로 여성이 적었기 때문이라기 보단 여성이 조직을 통솔하는 데에 거부감을 가졌던 분위기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당시 대학생이었던 심상정은 “옥바라지만 시킬 거면 내가 데려간다”며 여성들로 구성된 운동권 서클을 만들고 훗날 서울대 총여학생회를 만들었다. 86년 권인숙은 부천경찰서에서 당한 성고문을 폭로했으며, 이에 분노한 고려대 여학생 세 명이 검찰청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가부장적인 운동권 내부에 반발하여 99년 여성 운동가들은 '컵 깨기 운동'을 통해 젠더로 구분된 성 역할을 거부했다. 하지만 2018년의 지금 80년대 운동권을 호명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남성'에 머물러 있다.
연희가 따지듯 물었던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아요?”의 답은 이미 나왔다. 하지만 그 답을 얻기까지 진보를 자처하는 운동권 내부에서도 여성 차별은 늘 “나중에”라는 말로 미뤄지고 감춰져왔다. 영화 <1987>의 영어 제목 When the day comes을 번역하면 엔딩 크레딧에서도 울려 퍼졌던 민중가요 ‘그 날이 오면’인데, 그렇다면 <1987> 같은 영화가 나오는 시대에, 자연스럽게 다음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나중에’의 ‘그 날’은 언제인가?
하수상했던 시절, 시너에 불을 지르고 투옥과 고문도 감수했던
여성 운동가들과 막걸리 한 잔 걸친다면.
영화식사 13번째 레시피, 돼지고기 수육과 두부김치.
돼지고기 수육 레시피
준비물: 삼겹살 반 근(300g), 두부 한 모, 대파 1개, 양파, 된장 한 스푼, 블랙커피 한 스푼, 후추, 김치
1. 대파 몸통을 3등분으로 자르고 양파는 반으로 자른다. 된장 한 스푼, 블랙커피 한 스푼과 함께 삼겹살을 냄비에 넣고 후추로 가볍게 간 한다.
2. 삼겹살이 잠기도록 물을 넣고 팔팔 끓인다. 그동안 두부 한 모도 다른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인다.
3. 한 김 식힌 후 삼겹살과 두부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김치와 함께 그릇에 담으면 완성.
1987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김태리, 유해진 외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발화로, 사건을 은폐 및 조작하려던 공안과 군부에 맞서 진실을 밝히고 독재 타도를 외쳤던 사람들의 이야기.
사건을 전개하는 중심인물이 특정한 한 명에게만 치우치지 않고 실존인물인 최환 검사, 한재동 교도관, 고 윤상삼 기자 등과 함께 당시 국가 폭력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사람들의 노력을 균형있게 다뤄 호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