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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Jan 28. 2018

자기연민을 표현하는 세련된 화법

[ 영화식사 014 ] 강철비Steel Rain, 2017


<강철비>에서 북한 최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가 공화국의 지령을 받는 모습을 보자니 지금까지 봤던 남북소재물의 수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멀게는 <쉬리>부터 <태풍>, <베를린>, <은밀하게 위대하게>, <공조>까지.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도 남북소재물이라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되는 스토리라인ㅡ인간병기처럼 훈련받은 북한 공작원이 남한 사람을 만나 애틋한 민족의 정을 느끼고 신념체계가 흔들리는...ㅡ이 있는데, <강철비>는 비록 이런 기시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어도 이전에 나온 수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영화였다.      


남북소재물을 볼 때 북한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지는 적어도 창작물로서의 재미를 느끼는 데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 같다. 남북소재물에 등장하는 북한의 상황과 중심인물은 현실이야 어떠하든 남한이 바라보는 북한, 혹은 남한이 원하는 북한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생니로 사람의 목을 물어뜯어 죽일 만큼 잔인한 공화국의 요원이지만(쉬리) 그들에게도 지켜야할 가족이 있고(은밀하게 위대하게/태풍), 이념을 떠나 사랑과 우정을 교류할 인간미가 있다고 누차 확인하고 싶은 감정이 남북소재물에 반영됐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평했듯 남북소재물에서 북한은 분단을 겪기 전 한민족이 태생적으로 간직해온 어떤 순수함, 가족애를 상징해 왔다. 한반도가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립된 국력을 갖출 수 있는 천연자원의 땅. 그러나 스스로 고립되었으므로 언젠가 우리가 수복해야 할 공간이 바로 남한이 묘사하는 북한인데. <강철비>에서 차기 대통령의 보좌관인 곽철우(곽도원)가 일에만 매달리느라 자식들에게도 소홀한 이혼가장인 반면, 엄철우가 공화국에 충성하는 한편 설령 자신이 없더라도 가족의 안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설정은 자본주의에 물들어 각박하게 변한 남한과 달리 아직 ‘때 묻지 않은’ 북한이 가지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가족애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엄철우 같은 캐릭터는 이후 공화국의 음모에 휩쓸리거나, 공화국에 의해 가족의 해체를 경험함으로써 이념의 이탈자가 된다.     



<강철비>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곽철우가 남북 분단에 대한 강연을 하는 장면이다. 양차대전의 전범국인 독일은 전쟁 이후 89년 전까지 동서로 갈라졌지만 동아시아에선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서 냉전 최대의 전쟁이 터진 것도 모자라 남북으로 분리됐다는 것이 강연의 요지인데, 또한 곽철우는 CIA지부장(크리스튼 댈턴)과 비밀 접선을 마치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러게 멀쩡한 나라를 두 동강 내니까 서로 피곤해지잖아.” 나는 이 장면들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의 시각이 예전보다 진화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 남북소재물이 서로 적대적인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인물들이 정서적 충돌을 통해 역사의 비극을 실감하는 것으로 귀결됐다면, <강철비>는 6.25가 강대국들의 대리전이었음을 전제함으로써 냉전 이데올로기를 우리 영토 밖으로 밀어내기를 시도한다. 이때 공화국에서 이탈하여 남북 양쪽으로 고립된 엄철우의 캐릭터는 체제의 희생양이자, ‘우리의 의지가 아닌’ 전쟁과 분단을 겪은 민족의 자기 연민을 상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에 의해 대리전을 치룬 한반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변 국가들은 사실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미국은 한미동맹보다 미일동맹을 우선시하며, 중국은 북한 쿠데타 주도자인 리태환(김갑수)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하고, 일본은 북한이 쏜 미사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강철비>의 이런 장면들이 얼마나 사실적인가를 떠나, 중요한 건 전쟁을 막을 열쇠가 결국은 우리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부터 곽철우가 주장해오던 대로 남한이 북한 1호를 넘기는 대신 북한의 핵을 절반 나눠 가짐으로써, 전쟁 가능성과 평화의 실마리를 미국이나 일본의 개입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가 스스로 쥐게 된다는 결말은 그래서 신선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가진다.      


<강철비>는 더 이상 분단의 아픔을 실감할 수 없고, 딱히 통일을 바라지도 않으며, 단지 한반도 핵전쟁화가 두려운 세대에 어울리는 영화다. 더 이상 새로워지기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남북소재물에서 또 하나의 갈래를 모색한 영화이기도 하다. <인천상륙작전> 같은 끔찍한 영화를 제외한다면, 앞으로도 남북을 다룬 창작물은 우리가 북한을 보는 시각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지 않을까. 이제 <강철비> 다음이 기대된다.       


PS.

한편으로 남북소재물에서 북한은 자본주의를 경멸하며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라면 비인간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거친 공간으로 묘사되곤 한다. 여차하면 공화국을 위해 목숨도 바치면서까지 테러를 감행하는 묘사들은 남한 사회와는 굉장히 이질적인데, 이런 이질감은 달리 말하면 공포심이다.


빨갱이가 뭔지, 좌익이 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총으로 쏴 죽이는 무리가 바로 북한 무장공비라고 교육받던 그 시절, 왜 우리가 북한을 무찔러야 하는지 간단하게 설득하는 방법이었던 그 공포심. 이렇게 남북소재물에서 북한은 잃어버린 한민족의 원형이자 현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써 상반된 이미지를 오가며 북한을 바라보는 남한의 이중적 시각을 적절하게 재현해왔다.      



<강철비>는 이러한 공식을 좇으면서도 완전히 답습하지 않으려는 성실함까지 갖춘 영화다. <강철비>의 두 주인공이 상호 신뢰를 쌓게 되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외교안보수석 곽철우와 북한 1호를 직접 데리고 온 엄철우가 남북 긴장 상태의 중심인물임에도 정작 직접적인 사건 지휘에선 소외된 위치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두 사람 다 리태환(김갑수)이 일으킨 핵전쟁을 막으려는 입장이란 점인데, 지금까지의 남북소재물처럼 ‘한민족의 비극’에 감정호소를 하지 않으면서 세련되게 두 주인공의 유대를 성장시키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엄철우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음식. 아마 곽철우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영화식사 14번째 레시피, 잔치국수


잔치국수 레시피

준비재료: 달걀 1개, 멸치육수, 소면, 잘게 썬 김치, 대파, 홍고추

레시피: 달걀은 그릇에 풀어 예열한 후라이팬에 넓고 둥글게 부친 후 길게 썰어준다.

소면을 끓일 물을 센 불에 올려놓고 그 동안 다른 냄비에 담은 멸치 육수를 약불로 천천히 끓인다.

물이 끓으면 소면 한 줌을 넣고 익힌 후 찬물에 식히고 그릇에 담는다.

천천히 끓여놓은 육수를 그릇에 붓고 준비해둔 고명을 얹으면 완성.



<강철비> Steel Rain, 2017


양우석 감독의 영화 <변호인> 이후 차기작.


2011년 다음웹툰에서 연재했던 '스틸레인'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영화화가 결정되면서 원작과는 스토리 및 등장인물이 다소 변경되었다.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웹툰도 리부트되어 현재 다음 웹툰에서 재연재되고 있다.


영화 <강철비>에서 '스틸레인'은 미군의 다연장로켓 MLRS의 별칭으로, 예고편에선 이 무기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시점으로 CG제작된 영상이 삽입되었으나 본편에선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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