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식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녀 Dec 03. 2018

옥자에 대한 조금 비관적인 상상

[ 영화식사 024 ] 옥자, 2017


옥자를 구한 미자는 그 후 행복하게 살았을까. 영화 말미에서 옥자와 함께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온 미자에게서 언뜻 낯선 표정을 발견했다. 아니, 낯설다는 건 착각일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서 체득한 경험을 근거로 그가 마냥 속 편한 결말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라며 부러 의심을 부추기는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영화 첫 머리에서처럼 산골에서 옥자와 함께하는 미자의 마지막 표정은 분명 첫 장면의 그것과는 달라 여운을 남겼는데, 동시에 언젠가 읽은 은희경의 소설 속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처럼 철이 든 것 같아 도리어 슬퍼 보인다는 표현이 생각났다. 미자가 앞으로 행복할지는 당장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예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조금 비극적인 상상을 해보았다. 옥자의 환수가 목적인 이 영화의 중심서사는 시골과 도시로 대표되는 고유한 가치와 물신주의라는 두 세계의 갈등인데,  그 한 가운데에 선 미자의 선택을 통해 불길함을 점쳐보는 것이다.     


아버지가 받아온 금송아지도 마다하고 미자가 산골에서 도시까지 그 긴 여정을 어린 몸으로 멈춤 없이 내달린 이유는 옥자를 구하기 위해서다. 미자는 옥자가 좋다. 미자에게 옥자는 기업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건강하게 키워내는 경제동물이 아니다. 옥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그 어떤 제안도 미자에겐 거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최후의 난관에 도달했을 때 미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자본의 논리를 실감한다. 옥자에게 투여된 경제적 가치, 이를 위한 기업의 투자와 기대수익 등은 생명이니까 죽일 수 없다는 호소로는 이길 수 없다. 그 때서야 미자는 아버지가 옥자를 판 대가로 받아온 금송아지의 가치를 깨닫는다. 미자는 옥자를 살려달라는 말 대신, 낸시에게 금송아지를 내밀어 옥자를 ‘산 채로 사겠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손바닥만한 금송아지가 옥자라는 슈퍼돼지 한 마리의 가치와 동등한지. 아니 그 전에, 수완가이자 자산가인 낸시의 산법을 움직일 만큼의 자산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낸시는 그 금송아지가 정말 옥자를 내줄 만큼 가치가 있어서 미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니지 않을까.     



낸시의 눈에 비친 미자는 그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산골에서 같이 자라다 보니 정도 들고 가족 같아서 그 '돼지'를 죽이지 말라고 떼를 쓰는 어린애로 보였을 것이다. ALF(동물해방전선)가 말하는 생명의 가치니 휴머니즘이니, 이런 몽글몽글한 단어들은 애초에 낸시 같은 사업가에겐 그저 시시한 호소로만 들렸을 테다. ALF의 리더 제이는 번역의 정확함을 강조했지만 가장 정확한 번역에 성공한 사람은 미자였다. 미자가 건넨 금송아지의 가치가 얼마든, 감정의 호소보다 그 금전거래가 낸시의 언어에 더 가까운 행동이기에 비로소 낸시는 미자를 자신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대로 받아들인다.     


낸시가 미자의 거래를 받아들인 것은 어쩌면 낸시가 속한 세계에 발을 디딘 미자에 대한 환영인사가 아닐까.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교환은 인간이 맺는 관계가 아닌 상품들의 관계다. 미자가 옥자를 상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옥자는 더 이상 미자의 ‘옥자’로 존재하지 못하고 미란도사(社)가 생산한 상품인 슈퍼돼지가 된다. 이러한 미자의 행동은 장기적으로 보면 옥자를 포기하는 손해보다 앞으로 낸시 같은 자본가가 미자 같은 사람들과 마찰을 겪을 때 좋은 견본이 될 거라고, 낸시는 그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옥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미자는 더 이상 예전의 미자가 아니다. 진심을 돈으로 환산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세계. 아도르노가 말한 살아있는 것들을 죽은 사물처럼 취급하는 현상(사물화)은 바로 이런 세계였을 텐데, 그 세계의 언어를 배워버린 미자는 옥자를 환수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그렇기에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데엔 실패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돌려받은 소중한 옥자와 앞으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자가 옥자를 생명이 아닌 물적 가치로서 낸시와 거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물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미자는 자신의 금송아지로는 그곳에 있던 수많은 슈퍼 돼지를 구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옥자를 얻기 위해 미자가 받아들인 낸시의 ‘언어’가 이후 미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상상하면, 비관적인 상상을 피할 수가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내 일'은 내 일이 아님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