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반려동물에게 뒤늦게 전하는 나의 안부 - 0.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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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가 끝났다.
스스로도 조금 놀랄 정도로, 내내 축축했던 마음이 마치 비 오는 날 습기를 먹고 늘어진 종잇장처럼 눅눅해졌다. 요컨대 괜찮아졌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전보단 나아진 것이다. 사람들이 이래서 49재를 지냈던 걸까. 그 정도의 시간이면 마음이 아물진 못해도 전보단 덜 아파지는 시기라고, 어떤 비과학적인 경험들이 쌓여 관습이라도 된 걸까.
14년을 키우고 허무하게 보낸 내 고양이, 나의, 청이. 무려 14년 동안 보잘것없는 한 사람을 외롭지 않게 해 줬던 소중한 나의 청이가 올해 2월, 내 곁을 떠났다. 나의 사랑스런 고양이는 고통이 없는 세계로 먼 길을 떠났고 그와 동시에 내 앞엔 죽느니만 못한 아픔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 앞에선 평소대로 웃고 농담을 하다가도 혼자 있으면 가슴을 때리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었다. 어둠 속에 버려진 것처럼 무서웠다. 동시에 우리 청이도 먼 길을 떠나 무서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왜 혼자 보냈을까. 우리의 이별은 우리 둘 다 원한 게 아닌데 왜 너를 혼자 보냈을까. 후회막심한 밤이 계속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겐 청이 생각을 잠시 제쳐둘 만큼의 인간관계와 생계를 위한 의무들이 있었다. 매일 밤 죽고 싶어 몸부림쳐도 다음날엔 그런 의무들을 책임지기 위해 꾸역꾸역 지내다 보니 49재가 지났다.
이제 자해는 하지 않는다. 목을 어디에 매달지 고민하는 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산다면 오늘까지만 살자고, 아니면 올해까지만 살자고 속을 달래던 나날도 먼 일 같다. 불쑥 찾아오던 그리움도 다른 생각으로 억누를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청이를 잊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내가 원하지 않는다. 지금 겪는 고통의 일정 부분은 내가 제어하지 못하는 후회와 슬픔이 아니라, 스스로 청이가 보고 싶어서 불러오는 그리움이 담당하고 있다. 잊기 싫어서, 따뜻한 햇살과 포근한 이불만 봐도 청이를 떠올린다.
그래서 알고 있다. 평생 괜찮지 않으리란 걸. 나는 청이가 보고 싶어서 평생 스스로 이 슬픔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란 걸.
모니카 마론의 소설 <슬픈 짐승>에서 젊은 날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해 죽음이 가까운 노인이 될 때까지 그가 쓰던 이불, 그가 쓰던 안경을 꺼내보며 그와 살던 집을 떠나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는 활자만으로도 고독한 기분을 느끼게 했는데. 참 처절한 말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그보다 소중한 존재는 앞으로 없을 것이기에 과거만을 붙잡고 남은 생을 투여한 그녀를 이해한다. 그 사랑을 기억하느라 시달려야 했던 슬픔과 고통으로 온몸이 푸석해진 그녀를 이해한다. 청이가 떠난 뒤의 내 삶은 과거에 머무르며 미래에 눈 감은 슬픈 짐승의 삶이다.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 순간엔 기쁘게 너의 곁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열심히 산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잘 견디면서 살아온 건 맞다. 견디고 견디다 보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은 분명히 온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이건 단지 청이에게 전하는 안부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