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hamalg May 06. 2023

비움.

머리가 텅 빈 느낌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으니 논외라 하겠지만 한때는 마음속에 가득 찰랑이다 흘러넘쳐 온몸을 메우던 정의롭고자 하는 항상심, 선한 영향력에 대한 갈망, 긍정적인 의지, 세상에 대한 관심 등은 지나온 시간 동안 채워진 나이에 짓눌려 엄지발톱 언저리쯤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의 내가 안쓰러워도 하고,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던, 생동감이라곤 없는 여느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투명히 비워져 특색 없는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내가 예전의 나를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빛나기도 했었다 기억이라도 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을 너무나 사랑했던 당시의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내 인생의 한 조각이라도 잊혀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에 자그마한 생각의 파편이라도 떠오르는 대로, 또 곱씹어 보는 대로 거의 역사적 문헌에 가까운 수준으로 싸그리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아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통 없는 요즘의 나로서는 나를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아름답다고 맹신할 수 있었던 당시의 내 상태를 자기 확신이라는 가명의 정신과적 질환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믿기 어렵다.


무엇이든지 의지만 있으면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의지를 상실하고,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흘려보내버리며 조금씩 조금씩 더 그 존재가 희미해진다.


아! 아니, 목표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이루고 싶은 바램쯤은 지금도 있다. 그때의 목표는 세상을 이롭게 하여 모두의 갈채를 받는 모종의 무엇이었다면 지금의 바램은 평온한 내 집에 콕 갇혀있다가 오직 내가 원하는 때에만 밖으로 나가는 자유로운 삶이다.


아, 아니 또 있다. 로또 당첨. 세금 떼고 10억 쯤 받으면 우선 단박에 일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꼼짝없이 우리 집에 나를 감금시킨 후 만화책 애정판을 잔뜩 주문하여 쌓아 놓고는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어야지.

그리고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도시들로 긴 여행을 떠나야지. 부산에서 한 달, 멜버른에서 한 달, 또 마포에서 한 달, 잠실에서 한 달.


이 정도의 지난날 타령이라니. 나를 이루는 것 중 적어도 과거만큼은 톡톡히도 사랑하는 게 확실한 듯하다.


그리고 또 있네? 먹방 유튜버가 되어 매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먹고 싶은 음식만 먹고 돈도 버는 삶. 다만, 나는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평균적인 성인 식사량에 한참 미달인 데다 깨작거리기까지 하므로 다들 밥맛 떨어져 내 영상을 볼 턱이 없어 애석할 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서론을 길게 두서없이 찌글찌글 써갈겨주는 것이 또 평범하고도 일반적인 내 이야기에는 썩 어울린다.


각설하고, 결국, 그래서 나는 다시 기록 같은 걸 시작한다.

전과 달리 생각이란 걸 딱히 하고 살지 않기에 사색으로 응집되어 농밀하거나 언뜻 내비쳐지기도 했던 절절함이 묻은 문장들로 채울 순 없을 테고, 그저 매일 유사한 색채로 거듭되어 잊혀 부스러지는 일상적인 삶의 장면들을 다가올 시간 속의 나 자신이 어제로 떠올려낼 수 있을 만큼만, 그 정도로만 삶의 순간들을 문장 안에 가둬보려고 한다.


무의미한 오늘의 하루도 기억되어 과거로 떠올릴 수 있게 되면 머지않아 사랑하게 될까 해서.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도 끝내는 텅 빈 꼴로 지워지지 않고 어떠한 색채를 품게 될까 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