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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hamalg Sep 23. 2024

성범죄 근절이 어려운 여러 이유 중 하나의 서술.

지난 주말, 가까운 지인의 오랜 친구의 부모님이 남양주 소재에 새로 지었다는 별장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


나, 가까운 지인, 가까운 지인의 오랜 친구, 가까운 지인의 오랜 친구의 배우자와 두 딸이 한 자리에 모였다.


별장은 화이트 앤 우드톤의 복층 구조로 지어져 감성적이고 세련된 가까운 지인의 오랜 친구와 그 배우자의 감각이 십분 반영된 듯했다.


뒷마당에는 두 딸(별장 소유자의 손녀)을 위하여 호주에서 공수한 모래로 만든 미니 놀이터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데다가 뒷산에는 가지, 고추, 깻잎이 탐스럽게 영근 텃밭까지.


화룡정점으로 잔디밭 끝, 별장과 동일한 화이트 톤으로 지어 올린 독채에는 별장 소유자의 오랜 취미인 밴드 활동을 위한 드럼, 기타, 노래방 기계 등이 완벽 구비되어 있다.


나와 나의 가까운 지인은 아름다운 별장으로의 초대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 모든 돈 자랑에 토를 달기는 커녕 열심히 박수까지 치며 지치지 않고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새벽까지 들어주는 인내심을 발휘했다.


넘치는 부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거들먹거림은 쉼 없이 이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를 부러워하는 마음 8할, 태생적 찌질함에 기인하였을 열등감 때문에 바닥에서 당최 기어오르지 못하는 빈약한 자존감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2할을 합하여 그날의 메뉴로 등장한 항정살+목살의 구입처인 축산 백화점에서 단 몇 개월 만에 무려 금 10,000,000원을 소비하였다는 무자비하게 쓸데없는 자랑까지 감내하였다(진위를 의심하진 않는다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들어주다 독채로 이동 후 만취한 1인(나와 나의 가까운 지인은 아님)이,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기 시작하자 8할의 동경과 2할의 연민으로도 견디기 힘들어져 자는 척을 시전 했고, 겨우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잠든 척 덕에 가장 먼저 씻고 복층 다락에 마련된 매트에 벌러덩 누워 잠에 들기 일보직전,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내가 누워있는 매트에 올라와 행한 성추행에 겁에 질려 차마 눈을 뜨지도 못하고 꼭 감은채 뒤척거림으로써 잠들지 않았음을 겨우 알려내고 만짐을 막아냈다.


잠은 금세 달아났지만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안녕히 주무시라는 말만을 삐질삐질 입 밖으로 비집어냈다. 세 번 매트 위에 올라오고, 두 번은 방 문만 열었다. 마지막 문을 열 때에 이르러서야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나 내 상태가 온전함을 알릴 수 있었다.


나의 가까운 지인에게 어서 씻고 이 방으로 들어와 달라고 그 짧은 순간동안 바들거리며 간절히도 중얼댔다.


가까운 지인이 마침내 방으로 등장했고, 가까운 지인을 통해 겨우 항의했다. 나는 나의 가까운 지인이 항의하는 동안에도 그 다락에서 꼼짝없이 숨죽인 채 숨어버렸다.


그리고는 동이 트자마자 도망쳤다.

뻔뻔히도 방안에 숨어있기는커녕 1층 거실을 지키고 있던 성범죄자를 가까운 지인에게 부탁하여 나와 마주치지 않도록 방으로 들여보낸 뒤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나의 가까운 지인은 고소를 권한다.

나는 변호사고, 고소인 조사에 수 없이 참석했으며, 성폭력 피해자를 대리한 경험 역시 없지 않다.


그러나 결국 나는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찍 소리도 못한 채 지나가고야 만다. 고소는 지난하고 그 밤을 떠올리는 일은 불쾌하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성범죄자는 편히 두 다리 쭉 뻗은 채 계속해서 돈자랑을 나불대며 잘도 살아간다.

어리숙한 피해자만 도망치고 숨는다.


나는 또 한 번 가해자를 잊고, 내가 피해자임을 다시 한번 더 잊어낸다. 다음 유사 피해가 발생할 때까지.


피해가 다시 생기지 않기만을, 그리하여 영원토록 케케묵은 피해의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올 건덕지가 없기만을 멍청히 바랄 뿐이다.


사람 좋은 옆팀 팀장님이 조만간 참치와 닷사이를 먹자길래 메뉴는 좋은데 멤버가 누구냐 물었더니 둘은 부담스럽냐는 끔찍이도 부담스러운 내용의 당연히도 부담스러운 질문이 돌아온다.


“재미를 위해서라도 멤버 추가 하시죠.”라는 말을 삐질삐질 입 밖으로 비집어내어 다음 피해 발생의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축소시켰을 것이라 간절히 믿어본다.


살아있다는 것은 다양하게도 무수한 고난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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