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 #1회 5권 대출, 2주일간 대출 가능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사람이 무엇인지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후회하기도 하고 스스로 뿌듯해하기도 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멋진 엄마로 사는 것인지
멋진 엄마 되기를 기록으로 남겨보려고 한다.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선명한 기억 중엔 일요일 오전마다 아빠와 도서관에 갔던 것이 있다.
집에 있는 책들을 열 번도 넘게 읽어 달달 외울 지경이었던 내게 도서관은 보물섬이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꿈꾸던 것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책도 책이었지만, 도서관 나들이의 백미는 도서관 매점에서 먹었던 사발면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도서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상의 모든 책이 꽂혀있는 거대한 서가, 그리고 배고플 즈음 자판기에서 튀어나오던 사발면이다.
거대한 서가에서 내가 읽을 책을 맘껏 고르고, 자판기에서 (몇 안 되는 종류이긴 하지만) 내가 먹을 사발면 버튼을 누르는 즐거움이 대단하긴 했나 보다.
솜뭉치 발바닥을 가진 고양이처럼 서가를 휘젓던,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매점으로 향하던 양갈래 머리의 내 뒷모습이 기억 속에 이렇게 명료히 박제된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행복한 기억의 기저에는 자유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물론, 도서관을 향하는 그 방향 자체를 내가 온전히 선택했었던 것인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그 안에서의 선택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나의 아이들은 내가 어린이일 때보다 고를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외식 메뉴를 고를 때, 옷을 살 때, 하다못해 나는 마트에서 수박을 고를 때에도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준다.
물론 엄마가 선택할 권리를 준다고 해서 꼭 그걸 고른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이 고를 수는 있지만 승낙의 최종권자는 역시 엄마다.
그런 내게 아이들이 고른 것에 대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있다.
바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5권의 한도 안에서 아이들은 늘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골몰한다.
그게 뭐라고, 이 책을 꺼내 들었다 저 책을 꺼내 들었다 하는 걸 보면 그 모습이 참 이쁘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참 작고 쉬운 일이다.
일단 돈이 들지 않는다.
대출을 하고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서서 당장 반납을 할 수도 있다.
5권이라는(도서관마다 다르겠지만) 선택의 가짓수는 단 한 개를 고르는 것에 비하면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만약 수십 권을 골라야 한다면 그 자체도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다섯 권 정도는 나름 선택의 즐거움이 있다.
5권의 대출제한 권수를 모두 채울 수도 있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다.
책을 골라 대출을 하고 나면 이제 그 책을 보아야 할 시간이 숙제처럼 내 앞에 남겨진다.
선택에 지는 책임이라고 보기엔 상대적으로 가볍다.
이 책을 어디에서, 어느 시간에 볼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 또한 무한의 선택지 안에 있다.
아니면 읽지 않는 것을 선택지로 둘 수 있다(물론 이건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영역에 놓여있는 것 같긴 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것.
내 어린 시절, 자유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했던 그 소중한 행위가 사실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작고 쉬운 행위 중 하나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것이 행하는 이에게 작고 쉽다고 해서 그 자체가 가치 없는 일은 아니다.
내 선택의 '경향'을 쌓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이 될지 결정된다는 그런 뉘앙스의 명언들이 좀 있지 않은가?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반추해 보면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고르는 일은 주관식보다는 쉽고, 객관식보다는 어려운 삶의 연습 과정 같다.
도서관의 거대한 서가 앞에서 나는 내 답이 될 수 있는 후보 네댓 개보다는 더 많은 선택지 앞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때그때의 관심사나 변덕스러운 취향이 그 선택을 좌우하게 될 수도 있고, 사서분들의 북 큐레이션 앞에서 우연처럼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이 선택은 백지 안에 답을 빼곡하게 적어야 하거나, 창의적인 답을 요하는 문제는 아니다.
어떤 선택은 답이 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한 것도 아니다.
대출 기록에 삐죽 튀어나온 나답지 않은 선택이 있더라도 그것이 숨길 것이 되지 않는다.
때론 내가 찾는 것을 명료하게 알고 있어 도서 검색대에서 맹렬하게 그것을 찾아내려 할 수도 있다.
(그것이 있을 때의 희열과 없을 때의 허탈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휘적휘적 서가를 걸어가며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마지막 순간에 대출대로 가져가는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의 삶은 정말 선택으로 촘촘하게 짜여있다.
내가 비록 오늘 저녁에 피자를 먹을까 중국집을 갈까, 짜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고르는데 시간을 들이는 선택장애자라 하더라도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내 삶의 크고 작은 갈림길 속에서 누가 나 대신 좀 선택해 줬으면 좋겠다는 울부짖음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상황 속에서도 결국 나는 내가 해내왔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
최근 도서관의 두 달간의 휴관 일정으로 인해 1인당 대출권수가 20권으로 늘어났던 일이 있었다.
온 가족이 빌리면 80권까지 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가족은 휴관 시작 바로 전날 망아지처럼 도서관을 휩쓸었다.
철 지난 인문학 서적, 얇은 시집, 예전부터 읽어야지 벼르던 소설이 섞여 들어간 대출도서목록을 만든 것이 내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는 것 같아 스스로 뿌듯했다.
평소의 대출권수, 대출기간이면 빌리지 않았을 책들이 그 안에 있었다.
아주 드물지만 있음 직한 이런 순간은 나름의 일탈 같다.
삶에서도 이런 선물 같은 선택의 순간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걸 놓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를 수 있는 엄마다.
좋은 책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좋고 나쁜 것이 어디에 있나.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이 남을 뿐이지.
하지만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선택하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컸고, 내 아이들도 그렇게 키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멋진 엄마에 약간 가까워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