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Apr 08. 2021

소준철, <가난의 문법>


전에 살던 동네에서 한바탕 소동이 났던 적이 있다. 내가 살던 집 맞은편 건물 1층에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사셨다. 할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수거해오셔서는 좁은 골목 한가운데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폐지들을 정리하셨다. 동네 사람들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에게 화를 내거나 불평하기 보다는 이해하려는 분위기였다.


소동은 그 일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찾아와 아버지와 크게 다퉜던 것이다.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아들은 동네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고 평소 동네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고 꼬장꼬장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들이 다녀간 후로 작은 골목에는 "그 집 아들이 서울대 나와서 사업을 하다 망했다더라" "저 집이 할아버지건데 팔아서 자기한테 돈을 보태달라고 했다더라" 같은 소문이 돌았다.


나는 평소에 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던 것도 아니면서, 할아버지가 폐지를 잔뜩 늘어놓으시면 한숨부터 쉬었으면서도, 그 아들이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좀 화가 났다. 그 순간에는 아들로부터 할아버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아들이 찾아온 후 일 년이나 지났을까, 언젠가부터 할아버지의 리어카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연로하셨으니 몸이 아프신건가 걱정이 되었는데(아마 이건 골목 사람들이 비슷하게 생각한 부분일 것이다), 얼마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들은 할아버지의 집으로 며칠을 바쁘게 오갔다. 할아버지의 집 안에서는 오래된 책이나 재활용품들이 1톤 가까이 나왔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드나들던 낡은 현관문은 비로소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소준철의 <가난의 문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폐지 줍는 여성 노인 '윤영자'의 하루를 재구성해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는 부분과, 가난한 노인들의 삶과 복지, 쓰레기 분리 수거 정책에 대한 연구를 정리한 부분이다. 폐지 줍는 여성 노인들의 삶을 조각조각 이어서 만든 가상의 인물 '윤영자'의 하루 일과를 들려줄 때는 마치 '인간극장'을 보는 것 같다. 윤영자라는 사람이 정말로 아현동 어딘가에 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실감난다. 그러다가 그녀의 일과 사이사이에 적어둔 이 사회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를 읽자면 저절로, 그녀가 과연 우리와 격리된 채 납작하게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와 유기적으로 조응하는 입체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이 책은 폐지를 줍는 노인 여성으로 대표되는 가난한 노인들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다. 작가에 따르면 현재의 노인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안착되기 전에 이미 노령기에 접어든 이들이라 노후생활의 안정 위한 도구가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한 인구집단"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노인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생존 연령이 길어져 늙어감에 대처해야 하며, 다음 세대에 비해 국가 사회보장망의 보호가 미약한 상황 속을 '버티고' 있"고, "무엇보다 생계에 대한 책임은 (예나 지금이나) 개인이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가난을 단지 '젊은 시절의 무절제'나 '인생의 실패'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폐지를 수거하는 일 역시 단지 '인생에 실패한 가난한 노인들'의 생계 수단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유통 구조나 쓰레기 처리 방식 처럼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만들고 소비하고 버리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라는 것이다.


종이상자의 생산량, 배출량이 늘어나는 현상은 노인을 착취하는 일을 심화시키고 있다. 배달과 온라인 쇼핑이 활성화되며 종이상자의 사용량이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 집과 가게마다 다 쓴 종이박스의 배출량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젊고 부유한 소비자들은 폐품의 배출과 처리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종류에 따라 '분리수거'를 하면 자신의 책임을 완수했다고 여긴다. 게다가 종이박스가 늘어나면, 노인들이 수집할 것도 생기니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소비자가 노인들에게 돈을 더 벌 기회를 준 게 아니다!) 무엇보다 종이박스가 골목에 쌓여 있는 데 대한 책임은 대개 정부와 위탁 청소업자에게 있다고 여긴다. (본문 중)


그뿐인가. 종이나 재활용품의 가격은 "중국의 경제상황, 국제 유가, 국제 원자재 가격, 국내 경제상황 등이 변수로 결정되며 제지 업체의 매입 가격에서 중간업체들이 자신의 이윤을 계산하고, 최종적으로 고물상이 자신들의 이윤을 측정해 매입 가격을 결정" 하기 때문에 그 안에 이윤으로 엮인 자본주의의 거대하고 착취적인 구조가 그대로 드러낸다. 이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폐지 줍는 여성 노인이 살아가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그들의 존재는 "비공식적"이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을 읽는 일은 언제나 조금(사실은 많이) 괴롭다. '잘 몰라서' 괜찮았던, 나 자신은 예외라고 여겼던 것들 마저도 모두 '내가 알아야만 하는' 일임을 인정해야 할 때 인간은 도망치고 싶다. 작가가 바우먼의 글을 인용해서 설명한 "빈곤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 된다는 이야기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자주, 나의 괴로움을 나의 선함으로 손쉽게 갈음한다. 위험한 분노보다는 안전한 수용을 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거냐고, 그래도 남을 안돕는 것보다는 돕기라도 하는 게 나은 거 아니냐고 묻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TV화면을 가득 채운 누군가의 빈곤한 방을, 허름한 옷차림과 연이어 들려오는 그들의 가엾은 사연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고 묻는 건 착한 마음일테니까. 하지만 작가도 거듭 말하고 있듯이 "동정과 시혜보다 기본적인 삶이 보장 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변화를 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머물지 말고 '사회'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 말이다.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를 정리한 책 <상처로 숨 쉬는 법>에도 비슷한 논의가 나온다. 객관적 권력은 착한 사람들의 마음이 자선으로 이어지도록 적극적으로 권하는데, 그 이유는 현실을 통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구조적인 문제와 불평등한 시스템을 잊고 '나의 자선'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연히 가난한 이들은 보다 철저히 대상화되어 마치 상품처럼 전시되고, 보통의 착한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거나 그들에게 시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만족한다.


이런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 구조와 그 안에 내재된 객관적 권력을 통찰해내고,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 역시 자기 소외의 과정을 거쳐 지금 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봐줘야 한다. 그건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냉철한 문제의식"이 공존해야 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의 전환에는 우선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하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노인들 역시 나름대로 도시공간을 자신의 몸에 맞춰 전유하고 있다는 점 역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도시는 노인들의 마음과 몸에 알맞을까?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이 차도로 이동하는 이유가 뭘까? 무법자이기 때문일까? 이 사회에서 모두가 신체의 속도와 살아가는 방법이 각기 다르다는 걸 이해한다면 좋겠다. (본문 중)


나의 마음 속에서 그들이 마치 나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불편하고 가련한 존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들도 분명히 나와 함께 이 공간 안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엄연하고 떳떳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말이다. 그런 전환은 물론,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인식이 바뀌는 것 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역시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강조한다. 누가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관점을 바꾸고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배우고 반성하다보니 한 가지 일화가 떠오른다. 며칠 전에 볼 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있었을 때 본 장면이다.


할머니 한 분께서 유모차처럼 생긴 보행기에 물건을 잔뜩 싣고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차도에 내려와 계셨다. 나는 차에 치이기라도 하실까봐 우려도 되었고 무엇보다 그렇게 위험하게 행동하시는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 답답한 마음이 되었는데, 함께 타고 있던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 저 무거운 걸 끌고 가야 하는데 신호 안에 길을 못 건널까봐. 할머니는 지금 조급하고 걱정될거야." 그리고 돌아본 엄마의 머리카락이 유난히 하얗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행위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걸, 나는 자주 잊는다. 눈살을 찌푸리기 전에 우선 '저러는 이유가 뭘까' 고민하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결국 모두 늙고 병든다는 자연의 섭리를, 잊지 않기로 한다.






덧. 자립에 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 대해 통찰한 구절을 싣는다. 인간은 결국 혼자서기에는 영원히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 자립에 실패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자립이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임금) 노동을 신화화한 한국 사회에서 정부가 여전히 지원의 명분으로 삼는 정당성의 언어이자, 개인들에게 자발적 책무를 부과하는 통치 전략이며, 가난한 사람들이 삶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바라는 활동가들의 바람의 언어"로 아주 복잡한 프레임이 됐다. 어떤 주체가 말하는 자립이건, 경제적인 면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와 마을, 이웃에 의존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우리는 이 '자립'을 탈구축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자립'이란 개인의 독존이 아닌 상호의존을 기초로 해야 한다. (본문 중)


매거진의 이전글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