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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pr 01. 2021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결혼을 앞둔 스물 세살의 아름다운 니농은 자신이 예기치 못한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칠 수도 나을 수도 없는 병임을 알고 있는 니농은 약혼자 지노에게 파혼을 통보한다. 하지만 지노는 그녀의 결정은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의 병만 받아들이기로 한다. 모두가 끝났다고 말할 때 영원한 시작을 약속하는 두 사람.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니농의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니농의 어머니는 버스를 타고 남부 이탈리아의 결혼식장으로 향한다. 그들은 이 긴 여정에서 낯선 이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며 기대하지 않았던 깊은 연민을 나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눈먼 이야기꾼이 있다.




갑작스럽게 불치병에 걸린 여인, 위험하고 편견에 가득한 질병에 걸린 채 머지 않아 죽게 될 그 여인과의 미래를 계획하는 남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상상이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 둘이 정말로 서로를 사랑하나보다', 라는 막연한 감정을 공유할 뿐. 어쩌면 끝내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니농과 지노에게 가까이 가 닿을 수 없는, 그 거리만큼 내가 어딘가 좀 딱딱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기 어려운 그만큼, 그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그만큼 나는 나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니농과 지노가 될 수는 없고, 모두가 그런 불운을 겪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는 때로 어떤 불운도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말은 자주 개그가 아니라 진심이니까. 이런 장면에서 삶은 두려운 것이 된다.


우리는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믿지 않은지 오래됐다.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을 기도하면서도 이토록 진솔한 사랑이야기에는 신파고 촌스럽다는 색안경을 낀다. 때로는 우리가 모르는 모종의 이익(으로 대변되는 여러 조건들)이 있는 거라며 수근거린다.




존 버거가 그려내는 사랑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세밀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우리가 들었어야 할, 혹은 듣기를 원하는 그 많은 말들을 대신한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녀는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작가는 그와 그녀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대신,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음식을 설명하고 신랑 신부를 바라보는 많은 눈동자를 묘사한다.


신랑의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 신부의 아버지가 딸의 친구와 주고 받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어쩌면 우리는 몰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작가는 마치 '듣는다고 이해할 마음도 없지 않았느냐' 묻고 있는 듯하다. 당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그 말을 나는 끝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듯도 하다. 대신 이런 말을 들려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력하시지. 사랑하기 때문에 무력하시지. 만약 그분께 힘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을 테지. 친애하는 하느님은, 그렇게 무력함에 빠진 우리를 도와주시지."


"내가 너무 가까이 다가갔던 모양이다, 지노. 그 아가씨의 눈에서 고통을 보고 말았지. 너무 고통스러워서 더 이상의 고통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이더구나. 그때 아가씨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할 수가 없더구나. 커피 한 잔 마시고 그냥 나왔다. 할 수가 없더구나."


"자네가 제일 친한 친구라고 했지, 마침내 그가 입을 연다.

네, 맞아요. 모데나에서는요. 눈치 채셨어요? 사람들이 니농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해요. 음식을 먹으면서도요.

신부니까, 장이 말한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살아남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으니까. 마렐라가 조용히 말하고, 두 사람의 머리가 가까워진다. 강한 딸을 두셨어요, 페레로 선생님.

자네가 큰 도움을 주었지."


"밴드가 연주를 멈추고 지노는 니농을 바라보며 말한다. 할 수 있잖아, 행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지?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에게 깊은 키스를 한다. 행복의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흐른다.

영원 앞에서 뭘 하면 좋을까?

느긋하게 시간을 가지는 거지."





손해나 이익으로 표현되는 계산 없이 부드러운 사랑에 대해, 조건 없는 연민과 이해에 대해 우리 모두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품는다. 그 희망에 대해 나는 늘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 - 냉소, 편견, 차별, 혐오 - 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일이 간편하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은 때로는 좀 쑥스럽게 느껴진다. 소용 없는 일, 헛물 켜는 일, 철 없는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어쩌면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아픔의 목소리는 아닐까. 나의 쑥스러움, 당신들의 그 소용 없다, 철 없다는 말은 결국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울음은 아닐까. 홀로 깨어 있는 밤에, 홀로 걷는 길에, 홀로 눈물 짓는 시간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결국 아주 작은 희망,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 같은 것이니까. 그 바라는 만큼, 되려 쑥스러워하는 거다. 소용 없다고, 철 없는 일이라고 치부해서라도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은 거다. 이번에도 희망이 없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겁먹음일 거다.


그래서 다시, 사랑이나 희망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가 놓치는 수많은 인간적인 감각에 대해 말하려는 사람들의 글 앞에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건 얼마만한 용기일까. 그 모든 안 될거라는 말들에 맞서는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희망을 적는 일은, 나아가 그 희망으로 사람들의 딱딱해진 마음을 녹이고 설득해내는 일은, 그래서 다시 어떤 것을 꿈꾸게 만드는 일은, 아주 위험하고 아름답다. 나는 계속해서 항복하고 동시에 응원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내 그렇게 할 것이다. 이 위험하고 아름다운 용기가 끝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탈리아의 어느 마을에 있는 시장에서, 아이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정육점에 가는 길이다. 그녀의 다리는 아직 햇볕에 타지 않았다. 마렐라를 만난 아이 엄마가 아는 척을 하고, 마렐라는 유모차 안을 들여다본다. 유모차 덮개는 열려 있고, 아이의 눈에 햇빛이 비치지 않도록 웨딩드레스에서 떼어낸 레이스를 달아 놓았다. 마렐라는 입으로 쭈쭈 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노랑 똑같이 생겼네, 그렇지 않아? 이것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상황이, 그녀가 결혼식에서 거기에 맞춰 춤추는 음악 안에 담겨 있다."


니농과 지노의 영원한 시작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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