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와 작금의 기막힌 상황들에 대해 남편과 나 역시 알고 있다. 주로 내가 기사 등을 찾아보고 남편에게 읽어준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남편은 알길 원한다. 물론 내가 거품을 물며 분노하거나, 그러다가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는 건 원치 않지만. 우리 역시 장애인에게 이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주 느끼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사례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겪는 일들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고 계신 분들이 아주 많다는 것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우리가 겪는 일들로 장애인들의 고통이 작게 느껴질까 봐 두렵다. 나는 선정적인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럴 때 나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고통을 들려주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힘든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까지 주면 되겠느냐”는 댓글들을 떠올리면 내 그런 욕망은 최대치를 가리키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세상이 두렵다. 이런 순간에는 세상이 누군가의 고통을 끝없이 줄 세우고 평가하려 든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대신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남편은 안 보이게 된 후로 장애를 가진 분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분들을 ‘동료’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시각 장애인에 한정된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범위는 늘어간다. 그건 이런 식이다. 남편이 사용하는 흰 지팡이는 길을 걸을 때 ‘톡 톡’하는 독특한 소리를 내는데, 가끔 어르신들이 사용하시는 지팡이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나는 경우가 있다. 남편은 그 소리가 들리면 “내 동료인가?”하고 묻는데, 그럴 때 내가 아니라고, 할머니가 지나가고 계신다고 설명하면 처음에는 어쩐지 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자 남편은 할머니의 불편함에 대해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가끔은 어르신이 아니라 그저 다리가 불편하신 분의 지팡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남편은 더 골똘해지는 얼굴. 함께 걷다가 길을 비켜서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 내가 “전동 휠체어 타고 지나가셨어”라고 설명하면 남편은 더 골똘해지고는 했다. 그런 시간들을 건너, 이제는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서 다 듣고는 “휴. . 내 동료들. . “이라는 말로 심경을 표현했다. 나는 그것이 남편이 자신에게 새로 생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생각해서 그 표현이 참 좋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기발하다고 말하고는 한다. 한없이 자기 안으로 침잠해 들어갈 법도 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나' 밖으로 마음을 열어보는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의 장애’ ‘나의 불편함’이 아니라, ‘우리의 장애’ ‘우리의 불편함’이라는 마음. 남편은 그렇게 만나본 적도 없는 이들과 스스로 만든 연대감을 느끼고, 때로는 누린다. “아내야, 오늘 유퀴즈에 내 동료가 나온다는데?” 그리고 나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이들도 남편에게 ‘동료’라고 불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해보고는 그 요원함에 까마득해지곤 한다. 그 구분이 지워지는 날도, 오기는 할까. 그래서 감히 이렇게 말해보련다. ‘남편과 나의 동료들께’ 조금이나마 마음을 보탰노라고. 얼마를 보낼지도 역시 남편과 함께 상의했다. 언젠가는 동료들을 축하하는 의미로도 마음을 보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덧.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국민은행, 009901-04-017158
이제 전장연은 지하철을 5분 지연시키면 500만원을 물어내야 한다. 이 발표가 있던 날 시위에 나섰던 '남편과 나의 동료들'의 휠체어가 부서지고 조이스틱이 박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