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혼란스러웠다. 작가는 (아마) 의도적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여러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데, 때로는 그 명칭이 서너 개가 넘고, 장마다, 혹은 같은 장 안에서도 순간마다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명칭이라는 건 누군가에게 부여된 큰 이름이 아니라 아직 부여되지 않은 작은 이름들이다. 그날의 머리 모양, 입은 옷, 말투나 말버릇, 걸음걸이 같은 것들을 흉내 낸. 그 작은 이름으로 누군가를 부를 때, 나는 자꾸만 헷갈렸다. 이게 누구더라? 덕분에 자주 책장을 앞으로 넘겨 다시 찾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책장 넘기기가 지겨워질 때쯤, 겨우 한두 명의 작은 이름에 익숙해졌을 때쯤, 문득 이것이 작가가 바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잊히고 마는 것들을 바라봐달라고.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마는지 보라고. 온통 크고 분명한 것들로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쉬이 잊히고 마는 작은 것들을 기억해 주세요. 당신이 그 작은 것일 뿐임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크지 않다고. 너무 작아서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기억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일’을 장담할 수도 없노라고.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릴 수도 있는 연약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건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설사 그 기억이 나를 찌르고 베어도. 그래도. 기억한다면.
“아이들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잊고 사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애쓰며 성장할 것이다. 지구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무의미한 사건이었다고 자신을 타이르려 할 것이다. 그저 ‘지구 여인’이 눈 한 번 깜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더 나쁜 일들’도 얼마든지 일어났다고. ‘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고. 그러나 아무리 그런 생각을 해도 그들은 위안을 얻지 못했다.”
큰 것들에 가려진 작은 것들의 세계가 무참히 무너질 때, 부서지고 파괴될 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때, 문득 기억의 쓰임에 대해 떠올렸다. 작은 아이들이 “늙지도 않은, 젊지도 않은” 나이가 되어서도 잊지 못하는, 아니, 죽어도 잊지 못할 그날. 필요한 것은 뭐였을까. ”다른 사람의 분노를 이용해 자신의 논에 물을 대고 작물에 비료를 주는“ 어른은 아니었을테지. 큰 이름을 지키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맹목적인 어른도 아니었을 테지. 그저 도도히 흘러가버리는 시간도, 모든 것을 기억하는 듯해도 결국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도 아니었지.
그날 그곳에는 작은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작은 것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줄 사람. 그 작은 것을 인정해 줄 눈이,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작은 목소리를 전해줄 사람. 그 작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도움을 줄 사람. 하지만 그곳에 그런 존재는 없었고. 그곳에 머물렀던 작은 아이 둘은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뒤바꿔야 했다. 오로지 기억하기 위해. 기억을 담을 그릇이 되기 위해.
책은 우리가 작은 것들을 잊을 때, 큰 것들에 짓눌려 작은 것들이 담은 조각조각의 진실이 묻힐 때 마주하게 될 비극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내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는 놀라고. 놀란 마음은 황급히 작은 것들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