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타임머신을 타고 단 한 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안 갈 수도 있는 거죠? 상대는 약간 당황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얘는 왜 다시 살고 싶지 않다는 거지? 지가 그렇게 잘 살아왔다는 건가. 후회도 없이?
당시에 질문을 건넸던 상대에게 내 속내를 말할 기회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그 마음에 관해 설명하자면, 사는 게 고달파서 그랬다. 이만큼 사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전부 다시 살라니. 그런 선택을 왜 하겠는가. 아쉽고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모든 게 아쉽고 아파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었다.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게 덜 아쉽고 덜 아파서냐고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그냥 성향 차입니다.)
그런 대답을 하고 몇 년 안 돼서 나는 인생이 통째로 뒤집힐 법한 일을 겪었다. 그때 나는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빌었다. 앞으로는, 다시는, 지금처럼 살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종교도 없으면서, 기도도 안 해봤으면서, 뻔뻔하게 빌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도,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 이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네. 문과적 두뇌의 한계인 건가.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는 고정관념을 도저히 못 바꾸겠니?
전혀 힙하지 않은 문과적 두뇌에 일천한 과학적 지식을 가진 내게 ‘영생’이라는 말은 그저 종교적인 의미로만 읽혀왔다. 혹은 신화적인 의미이거나. 그런 건 없다고 단호하게 믿으니(무식이 이래서 무섭다) 사기는 안 당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드라마 ‘도깨비’가 대히트를 할 때도 나는 도깨비의 고통과 고뇌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지난하고 구질구질한 생활이 끼어들지 않는 영생이 뭐 그토록 애달프고 눈물 날까, 그런 냉소적인 마음이었다. 도깨비는 어마무시한 부자인데다 능력도 대단해서 그에게 ‘생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 않은가. 그런 삶을 통해서는 영원의 저주가 도무지 와닿지 않았다. 물론 내 상상력의 한계를 탓하지는 않았다. 이제 보니 나 많이 삐뚤어졌었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롤라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시간의 태엽을 감아야 했다. 아침이 왔구나, 생각해야 해가 떴다. 이제 잘 시간이야, 해야 어둠이 왔다. 나는 내가 만든 사막에서 모래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아는 온갖 것을 사막으로 불러들여 온갖 짓을 다 해도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다. 사막의 모래를 핀셋으로 집어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나는 해상이 사막에서 눈을 뜨는 시점부터 가슴이 아려서 책을 자꾸 덮어야 했다. (사실은 그 한참 전부터 눈물 바람을 했다.) 억겁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하는 영생의 삶이 실질적인 고통으로 다가왔다. 두렵고 아프고 괴롭고 허망했다. 뭐지. 나 이렇게 말랑한 사람 아닌데. 내 감정에 반대해 보려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삶을 두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그 삶을 잘살아 보려는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런 욕망이 없다면 괴롭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 아득해지던 감각을 기억한다. 그럼 나는, 이 삶을 얼마나 잘살아 보고 싶었던 걸까. 내 괴로움의 출처가 분명해지던 찰나기도 했다. 나에게 그만 괴로워해도 된다고 위로해 줄 수도 있겠구나, 깨닫던 날이기도 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은 두렵다는 말이었구나. 나의 아픔을, 슬픔을, 넘어짐과 부족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과거의 어느 때로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다시 돌아간대도 또 그렇게 살 것임을 알기에 굳이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믿게 되었고, 그 모든 선택을 전보다는 훨씬 더 많이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와닿지 않는 기회 말고, 그저 지금, 오늘, 여기서 두 발을 땅에 확실히 딛고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여기서 오늘치의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빈다. 작가가 말하는 나의 ‘항구적 기질’이란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