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하민 라바투트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해’는 생각보다 잔인한 과정이어서 이해하려는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을 허물고 상처 내는 경우가 많다고. 그러니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지나치면 안 된다고. 되도록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인정하라는 말도 따라왔다. 나는 사전에서 이해와 인정을 찾는다.
이해: 1.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인정하다: 1.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다.
(‘인정하다’의 뜻이 자칫하면 ‘판단’과 맞물리는 게 아닌지 홀로 오래 고민한다. 판단은 상대를 가두는 것이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니까)
먼 곳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며 ‘이해’에 관해 이야기한다. 친구는 말한다. “이해라는 게 정말 고통스러운 거잖아.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려고 애써보면 알잖아. 그러니까 남한테 이해하라는 말은 못 하게 되더라.” 나는 정말 그렇다고 대답한다. 맞아. 나에게도 하라고 말하기 힘든 일을 남에게 하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 친구는 말을 잇는다. “남한테 쉽게 ‘이해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를 이해해 보려고 애써본 적이 별로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당신이라는 우주를, 과학이라는 우주를, 나라는 우주를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는 걸까. 이해의 건너편에 있는 뭔가에 닿으려고 밤잠을 설치는 걸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 심연을 들여다보느라 내가 미칠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더, 또 한 번만 더 그렇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이 책에 나온 인물들은 뭔가를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것의 심연까지, 심연의 끝의 끝까지 다가가 보려고 한 사람들. 팔다리가 부서지고 뜨거운 열기에 내 존재가 바스러질 것 같아도, 그래도, 거기까지 가보려고 한 사람들. 누군가는 거기에 닿았을 테고, 누군가는 닿지 못한 채로 멈췄을지라도. 그들이 뭔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슈바르츠실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까?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조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중에서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은, 때로는 그것을 포기하고, 놓아주고, 잊어버리는 것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것의 심연이 말하고 있는 것을 그저 들어주는 것임을 기억한다. 내가 그것을 이용하고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너의 의지’라고 믿고 싶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지만 한낱 인간일 뿐인 우리에게 깨달음은 언제나 늦고, 이 책이 말하고 있듯이 뭔가는 이미 완전히 바뀌어버린 뒤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렵다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자꾸만 묻게 되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