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단비 Aug 22. 2022

채워지지 않아도 좋아

엄마 성장기

삶의 기준들이 달라지고 있다.

아기가 없었을 당시엔 뭐든 좀 더 좋은 편을 추구했고 욕구나 만족감이 일정선은 채워져야 잘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일 맛있는 커피, 머리 잘하는 곳, 맛집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장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더랬다.


9개월 아가와 함께 살아가는 요즘, 새로운 나의 모습들을 직면하게 된다. 맛있는 커피가 아니고서는 입에 지도 않았던 시절이 있었건만 아기가 잠시 잠을 자주는 타이밍에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꺼내 45도의 분유 포트 물을 부어 한 잔 마시고 나면 그런대로 괜찮은 것이다.

커피에 45도가 무슨 말인가! 예전엔 생각지도 못할 상황이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포트에 물을 담아 끓이는 1~2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뜨끈한 치킨, 떡볶이가 배달이 왔다.

바로 먹고 싶은 마음에 봉지를 여는 순간 아기가 잠투정으로 울기 시작했다.

아기를 재우는 내내 머릿속에 치킨과 떡볶이로 가득했지만 배달음식이 식어가는 것 또한 용납이 되는 게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식어버린 음식이지만 배달음식을 시켜먹는 것 자체가 그저 좋은 것이다.


머리는 어떠한가! 힘차게 솟아오르던 새치가 길어져 브릿지가 되어가고 있어도 내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면 제법 참을만하다.

밥을 먹을 때도 위가 빵빵 채워져야 잘 먹었다는 안도감이 있었는데, 밥을 먹는 순간에도 눈과 모든 신경이 아기에게 향해 있기 때문에 허기를 달랠 정도면 그저 족할 뿐이다.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이 현실이건만 그럭저럭 괜찮은 게 더 신기할 노릇이다. 괜찮을 뿐만 아니라 잠깐의 자유시간에 45도의 인스턴트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음이 소중하게 느껴지고 적당한 타이밍에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음 또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기가 안겨서 잘 때면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는 날도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채워지지 않는 순간이 오면 아쉬움과 짜증이 몰려왔던 그날들이 언제였던가..,

채워지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니 살아내고 있다.


시간과 여건과 환경이 주어졌을 때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우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건만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욕심이 아니었을까라는 마음이 든다.


60을 가지고 있었을 때엔 100은 아니더라도 80은 채우고 싶었던 게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50이 채 안 되는 하물며 30이나 40이어도 그런대로 괜찮은 게 정말 이상할 노릇이다.


아가와 함께 하는 삶은 채워지지 않아도 그런대로 괜찮게 느껴진다.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내려놓음일까, 아마도 엄마가 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건 아닐까!


오늘도 잠든 아가를 안고 무음으로 나오는 TV를 켠 채 자막으로 TV를 보고 있는 이 순간이 그저 좋기만 하다.  



_봄단비



매거진의 이전글 니코틴 토끼를 사랑하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