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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Oct 27. 2024

나의 무언가 원정기

호랑이도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데, 사람인 나도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어떤 걸 남기고 싶은데?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희망 사항을 품고 있던 날들이었다. 척척석사를 졸업했으니, 졸업논문에 이어 오랜만에 논문을 써볼까? 배웠던 가닥이 있으니 그 편이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뭔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재미가 없잖아. 단순히 나의 이름이 어딘가에 남는 것만 원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마도 내 안에서 뭔가를 분출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차곡차곡 마음에 쌓이던 먼지들이 표면장력을 넘어 밖으로 흘러넘친 순간, 나는 그 ‘무언가’를 찾는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마음이 이끌린 것은 음악이었다. 작곡으로 멋지게 무언가를 표현해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초반에 해야 할 밑 작업이 너무 많아 보였다. 음식을 하려면 일단 칼을 잡고 무언가를 자를 줄 알아야 하듯이 작곡을 하려면 음악의 기초에 대해 최소한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다행히 화성학은 물론 음계조차 배우지 않고 간단한 방법으로 하는 작곡법도 있었다. 수업을 들으며 내 일상의 소리에 귀 기울여 집중하고 녹음해 보았다. 악기가 아닌 주변의 물건들을 이용해 나만의 소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분명 나의 마음에 쌓인 것들을 해소하고 풀어내기에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 낸 나의 노래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음악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 못해 송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건 음악이 아니라 그냥 소리나 소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밤을 새워 완성한, 고작 2분 남짓한 결과물을 무려 돌비 애트모스 홈 시어터 스피커에 연결해 기대에 찬 얼굴로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이게 뭐지, 수업 같이 들은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만들었어? 어떻게 말해야 아내가 상처받지 않을지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동공 흔들림이 아직도 생생할 지경이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간단하게라도 작곡을 위한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시작하겠다고 도전했지만, 문제는 그 배워야 할 기초가 너무 많고 어려웠다는 것. 의무교육 기간의 음악 시간에 배웠던 것 같기도 한 음계, 박자와 장단조부터 시작했지만 결국은 화성학의 ㅎ조차 채 배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 후엔 빠르게 작사로 넘어갔다. 아마도 어려운 작곡을 배우며 흥미를 잃는 일반인이 많다 보니 작곡과 작사를 묶어 패키지로 강의하는 모양이었다. 그 전법은 꽤 성공적이었는데, 작사 수업 회차로 넘어가면서 수강생들의 참여도와 집중력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작사는 한국어와 약간의 외국어만 할 줄 알면 아주 간단한 기초만 배우고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 내가 화성학보다는 한국어를 훨씬 잘하지, 암.


작사는 일단 바로 뭐라도 끄적거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작곡에 비해 훨씬 쉽고 재미있게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뚜렷한 한계를 마주했다.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이상 작곡 전에 작사를 먼저 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곡의 대략적인 주제와 느낌, 심지어 각 마디에 들어갈 글자의 수까지 모두 작곡가가 정한 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해진 틀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쾌감은 있었지만, 이건 내 안의 무언가를 꺼내놓는다는 충만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뭐랄까, 직장에서 예산을 정리하다 복잡한 숫자가 딱 들어맞아서 계산이 끝났을 때의 뿌듯함과 더 가까워 보였다.


아리송한 나날을 보내며 수강을 이어가던 중, 기분이 울적한 날 신나고 도전적인 응원가 가사를 내놓아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내가 원하던 것은 이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제 음악이 아닌 다른 언어를 찾을 차례였다.     


내가 선택한 다음 수단은 글이었다. 에세이 쓰는 법을 배우면서 마음도 다독일 수 있다는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형식의 제약이 없는 에세이라는 장르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글쓰기를 배우는 데 마음도 편해진다고? 이게 웬 떡이람! 그렇게 에세이 쓰기에 얼렁뚱땅 도전했다.


에세이 쓰기는 재미있었다. 한글로 글을 쓰는 법이야 학교에 다니며 이골이 나도록 배운 것. 직장 보고서도 아니고 과제 논문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어 글을 쓰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일기를 쓰려고 할 때는 떠오르는 문장을 손으로, 자판으로 적어나가기엔 마음속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모 드라마에선 사람들은 혼자 보는 일기에도 거짓말을 적는다더니, 내 마음의 찌꺼기들을 온전히 명시해서 적는 것이 홀로 보기에도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에세이를 쓰는 법을 배우면서, 적으려는 대상과 나 자신을 분리하고 떨어뜨려 보기 시작했다. 끈적하게 붙어있던 상대를 떨어뜨리고 마음이 가벼워지니 글로 적어내는 것도 조금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 쉽진 않았지만, 글쓰기 실력도 늘고 마음도 정리되는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쩔 수 없는 걸림돌이 있었다. 에세이는 거짓말을 쓸 수 없다. 내가 겪은 일, 내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솔직하게 써야 의미가 있었다. 예리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두루뭉술 쓸수록 재미가 없었다. 말하고 싶은 걸 쏙 감춰놓은 글을 누가 빠져들어 읽는담.


나의 약한 모습은 한 번 상대에게 드러내면 주워 담을 수 없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든 나에게 화살로 돌아와 날 아프게 할 것이다. 후회할 거야. 뿌리 깊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나에게 나 자신을 개방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뜩이나 사서 걱정이 특기인 나는 이걸 꺼내놓으면 저게 잘못될까 걱정, 저걸 보여주면 이럴까 봐 걱정하느라 글쓰기에 진전이 더뎠다. 스멀스멀 연기같이 피어오르는 걱정들은 내가 정말 글로 정리해서 담아내고 싶은 주제들을 입 밖으로도 내놓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이제 어쩌지? 그래, 거짓말쟁이가 되어보자. 내가 느낀 점들을 거짓말로 포장해서 남 일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글로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배워보기로 했다.


소설 수업에는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고, 이미 집에서 혼자 소설을 쓰다가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놀라운 것은 수강생 대부분이 진지한 작가 지망생이라는 점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다른 수업들에 비하면 거금을 들여 등록해야 하는 수업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전문적인데? 생초짜 아마추어인 내가 올 곳은 아닌 건가.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야, 누구든 처음은 있는걸. 그리고 어차피 일정 맞는 강의는 이것밖에 없어. 대충 간 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나가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심지어 깡도 좋게 일정이 맞는 것을 최우선으로 강의를 고르다 보니 짧은 이론 설명 후에 바로 소설을 쓰고 합평하는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3장 남짓한, 단편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엽편소설을 써오라는 과제에도 무엇을 쓸까 고민이 깊었다.


그리고 소설 쓰기를 채 시작하기도 전에 곧 깨달았다.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거짓말은커녕 입바른 소리도 못 해서 곤란하던 사람인데, 이걸 왜 잊고 있었지? 큰일이었다. 급하게 유튜브 소설강의를 뒤지며 중구난방으로 주제를 떠올리다 처음에 내가 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는지 떠올렸다. 그래,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어서 묵혀왔던 것들을 쓰자.      


소설을 배우며 신기한 것은 내가 겪었던 일을 그대로 적는다고 해서 소설이 완성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에세이로 쓸 때야 ‘이건 사실이야,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주장하면 그게 무슨 일이건 독자가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의 문학이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도 사실보다 더 현실에 있을법하게 각색해야만 독자가 거짓임을 자각하지 않고 소설에 빠져들어 즐길 수 있었다. 이 주인공은 지금 왜 이런 감정을 느끼나? 저 등장인물은 왜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는가? 우연보다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적절한 장치들이 필요했다.


처음엔 내가 겪었던 일과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것, 상상한 것을 적절히 섞어 소설을 만들었다. 마침 요즘 국내 소설의 트렌드가 에세이 같은 느낌의 소설이라고들 해서 더 겁 없이 적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수강생의 글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현실에 있을 법 하지만 누가 봐도 작가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닐 법한 주제와 이야기를 너무나 잘 구상해 오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많았다. 내가 MBTI에서 N(직관형)이 아닌 S(감각형) 이어서일까? 말도 안 되는 공상은 애초에 떠올리지도 않는 나에게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연금술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였다.


합평하면서 이야기꾼처럼 끝없이 다양한 이야기 상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움이 느껴졌다. 나도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그들처럼 경험 비중을 줄이고 상상의 비중을 늘려 소설을 써보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가장 좋은 평을 받은 소설들을 추려보니 결국 내가 경험한 것과 보고 들은 것들의 비중이 높은 소설들이 좋은 평을 받았다. 없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만들어내기보다는 있었던 이야기에 세세한 묘사로 살을 붙여내는 편이 나에게 좀 더 맞는 모양이었다.     


재미있게도 에세이를 쓸 때와 소설을 쓸 때 합평에서 나의 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 분명 에세이를 쓸 때는 희망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글을 쓴다는 피드백을 들었는데, 막상 소설을 따뜻하게 써보자니 영 감이 오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선 따뜻하게 먹고 싶다고 우기다가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커피를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그보다는 지저분한 현실을 싸늘하게 그려내는 편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고 합평에서 반응도 더 나았다. 하지만 많은 수강생들이 따뜻한 소설은 적기 어렵다고 말하는 걸 보면, 어쩌면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원래부터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글쓰기 안에서 두 가지 장르를 한꺼번에 배우기 시작해서일까. 소설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으면 소설은 못 쓰겠고 에세이 주제만 떠올라서 시작조차 어려웠다. 그렇다고 에세이를 적으려 마음먹으면 떠오르는 소재들은 다 소설로 써야 할 것 같았다. 2개 국어를 하려다가 0개 국어자로 전락한 사람의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상대가 느끼도록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분명 호랑이를 그리려 시작했는데 다 그리고 보니 뜬금없이 꼬리 두 개 달린 고양이가 나타나기도 하고, 깊은 맛의 청국장을 끓이려는 의도였지만 갑자기 된장 향이 나는 알리오올리오 파스타가 짜잔, 등장하기도 했다.


에세이도 소설도 이제 겨우 수업 하나씩만 들었으니, 언어로 치자면 알파벳만 배운 셈이다. 나에게 이 언어들은 무엇을 가져다주었나. 일상을 지내며 마음속에 남은 것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 뭉쳐 얹힌 것처럼 거북할 때, 술술 꺼내어 눈앞에 늘어놓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언어에 도전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에 먼지가 내려앉는 일은 살아있는 한 멈추지 않을 테니 일단 배워놓은 나의 글쓰기도 가늘고 길게 이어질 수 있을 테다. 만약 운이 좋다면 그걸 읽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작은 울림을 줄 수 있겠지. 내 마음을 꺼내놓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어떤 것. 이것이 내가 찾던, 남기고 싶은 ‘무언가’라면, 그렇다면 글쓰기는 그 ‘무언가’의 역할을 충분히 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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