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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화 Apr 12. 2017

조금씩 천천히 안녕 지베르니

두 번째 유럽 세 번째 파리 - 넷째 날

파리에서의 네 번째 날이다. 일기에는 세 번째 날로 잘 못 적혀있었다.


지베르니는 이번 여행에서 나름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초록빛 가득하고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며 잔잔하게 흐르는 연못.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을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지베르니는 화가 클로드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한 곳이다. 모네가 직접 정원을 가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수련 연작이 있는 것은 아직도 생생하다. 타원형의 새하얀 벽에 수련이 상상외로 크고 길게 뻗쳐 있던 것은.


전날 일찍 잠이 들었지만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새벽 내내 계속해서 깼다. 세 번쯤 깼을까 일어나서 멍하니 있다 씻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시간은 꽤 남았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해 여유 있게 집을 나섰다.


대체적으로 아침에 수월하게 일이 잘 풀리면 그다음 일이 안 된다. 지하철을 타러 갔다. 티켓을 넣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는데 열리지 않았다. 손으로 열어보려 해도 열리지 않았다. 내 티켓을 먹었다.


일단 지상으로 나와 다른 역 입구를 찾았다. 하지만 역무원이 없고 없으니까. 역무원이 있는 지하철 메트로를 찾았고 또 스트라스부르크 생 데니스(strausbourg-saint denis) 역이었다. 역무원에게 설명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역무원이 어디로 가냐고 묻기에 목적지를 말했더니 가야 할 방향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그렇지만 못 알아 들어서 헤맸다. 지하철도 원래 가려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걸 탔는데 어쨌든 생 라자르(saint-lazare) 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서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위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3층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2층에서 헤맸다. 부띠끄가 문을 닫아서 표를 어떻게 사야 되나 발을 동동 굴렀다. 시간표를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라 열 시에 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토요일인 것을 그 때야 깨달았다. 열 시에 문을 열면 나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기계를 이용해 샀다. 매우 불안하게.


티켓을 사고 나서 위로 올라왔더니 부띠끄가 열려있었다. 그 허망함이란. 미친듯한 불안감과 배신감이 온몸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앉아서 얌전히 기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Retard 20 min

한참을 기다리다가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지연된다는 말 외에는 못 알아 들었다. 환불을 하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타라는 건지.


그래서 부띠끄에 들어가서 수많은 줄 중 하나로 스며들었다. 거의 열 시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 직원에게 ‘티켓을 샀는데 지연 방송을 들었어 혹시 문제가 있니?’라고 물었다. 직원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른 기차를 타라고 말해줬다.



다시 나가서 전광판을 보니 루앙(Rouen)행 기차가 있었는데 그건 Vernon(지베르니 역)을 지나가지 않고 쭉 가는 기차였다. 그걸 타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앞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안 된다고 그냥 기다리라고 했다. 내가 결제한 기차보다 뒤 타임 기차가 먼저 출발할 것 같아서 약간 기분이 이상했지만 다행히 VOIE가 떴다. 사람들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바코드를 찍지 못한 나는 뒤늦게 탔다. 사람들이 뛴 이유는 비지정석이기 때문이었다. 미리 찍어둘걸. 정말로 다 까먹었다. 그래도 바코드 찍는 걸 기억해낸 건 다행이었다. 바코드 안 찍었으면 벌금을 내야 하니까. 빈자리도 남아 앉았다. 옆 사람이 애니메이션 보는데 같이 보고 싶었다.


기차에 내려서 잠깐 헤맬 뻔했지만 모두들 가는 곳을 따라가면 지베르니로 갔다. 셔틀버스 타는 것까지 수월하게 진행됐다. 버스에서 내려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적어지고 그제야 헤매기 시작했다.



모네의 집 입구는 굉장히 작았다. 사람 키 만한 담장에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초록 문. '이렇게 작은 곳에 정원이 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았다. 매표를 하고 빛이 비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드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내가 갔을 때는 꽃이 온전히 피기 전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새만 지저귀고 조용했고 고요했다. 관광객들로 가득했지만 관광객들의 말소리도 고요함에 적당히 스며들었다. 간간히 들리는 대화 소리들이 잘 어울렸다. 정원을 둘러보기 전 모네의 집 내부를 둘러봤다. 집은 깔끔하고 아기자기했다. 모네가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는 곳은 빛이 잘 들어왔다.


세잔의 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봄과 가을이라는 서로 다른 시기에 방문했지만 세잔의 집은 나에게 물기를 머금은 연갈색, 모네의 집은 생생하고 다채로운 느낌의 초록, 보라, 노란색이 가득했다.


집을 둘러보고 정원을 한참을 둘러봤다. 꽃이 아직 만발하지 않은 시기인데도 아름다웠다. 일본식 다리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이 조금 특이했다. 작은 터널 같은 걸 짧게 지난 기억이 있는데 불확실하다. 연못이 있는 곳은 정원보다 조금 더 조용했다. 대나무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얼핏 바람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원에서의 시간은 고요했다.


상상한 그 정도였다. 실망도 없었다. 내가 딱 상상했던 만큼 여유로운 내 시간을 갖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좋았다. 아마 다시 한번 방문한다고 해도, 특별한 일이 없다고 해도 다시 갈 예정이다.



정원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배가 고파서 파스타 집을 검색했는데 가격이 상당했다. 가로로 긴 형태의 마을을 정처 없이 걸었다. 빵집이 있었는데 너무 빵집이 아닌 것 같이 생겨서 망설였다. 그래도 배고프니 일단 들어갔다. 직원에게 샌드위치를 찾는다고 하니까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내가 찾던 에멘탈, 햄, 야채가 있는 샌드위치를 골랐다. 가지고 나왔다. 6유로인 줄 알았는데 5 유료였다.


먹을 때가 없어서 돌고 돌아 지베르니 집 앞으로 갔다. 가는 길에 한 여성분과 아이가 빵 어디서 샀냐고 물어봐서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샌드위치는 먹을 만했다. 앉아 있는데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이 흐려졌고 바람이 불어 점점 추워졌다.


아무래도 밤 여섯 시에 기차를 예매해 놓은 건 무리였다. 마침 셔틀버스 출발시간 20분 전이라 서둘러 버스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버스를 기다리는 20분은 매우 지루했다.



기차역에 도착해 직원에게 티켓 바꿔야 되냐고 하니 그냥 타라고 했다. 알지만 그래도 매번 물어본다. 기차를 탔는데 이번에도 겨우 한 자리에 앉아서 갔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냥 숙소로 향했다.


이날의 일기를 되짚어 보면 굳이 그렇게 급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됐는데. '왜 그렇게 급했을까?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싶다. 여전히 이곳에서 초조하고 낯선 것을 보며 이방인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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