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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Aug 23. 2019

오리백숙을 먹고 나서 깻잎 김치를 담그고 싶어 졌다.

 똑. 똑. 똑. 

 엄마가 왔다. 혹시나 아이가 깰까 엄마는 늘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그래서 엄마라고 말하지 않아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엄마라는 걸 알 수 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 엄마와는 달리 격한 반가움으로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 선 엄마의 양 손에는 늘 그렇듯 바리바리 싸온 음식들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청포도. 양파와 감자, 부추, 그리고 엄마가 직접 고아 온 오리백숙 까지. 

 우리 집에 오는 엄마의 양손이 늘 무겁듯이 엄마를 반기는 말은 늘 같다. 

 “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무겁게.”

 엄마는 바리바리 챙겨 온 것들을 자연스레 냉장고에 넣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늘 그렇듯.  

 “우리 꺼 산 김에 너희 것도 좀 샀지.”

 이상하게 우리 대화의 시작은 늘 같다.      

 엄마가 저녁으로 먹을 오리백숙을 냄비에 덜어 내며 엄마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내게 말했다. 

 “아픈 건 좀 괜찮아? 약재 듬뿍 넣고, 밤새 푹 끓였어. 그러니까 잘 먹어. 잘 먹어야 낫지.”

 엄마가 무심하게 던진 그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1년 간 해오던 연재를 잠시 쉬기로 결정하고, 요 며칠간 꽤나 아팠다. 열도 나고, 목 안이 퉁퉁 부은 것 같고, 그 좋던 식욕도 잃었다. 감기인가 싶었는데 10개월 아들의 수족구 완치 판정을 위해 들린 병원에서 ‘수족구’와 ‘알레르기성 비염’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입에 베어 물고, 코맹맹이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안녕? 나는 족구야. 수족구. 그리고 인사해. 알레르기성 비염도 같이 왔어.”

 가게 일로 바쁜 엄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이고. 어떻게 해. 이럴 때 내가 애라도 봐줘야 하는데.”

 엄마는 쉬는 날이 올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어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코가 잔뜩 막히고, 목이 부어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괜찮아. 괜찮아지겠지, 뭐.”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몸이 아팠던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혼자서 아이를 보는 것이 힘에 부쳐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남편은 집에 돌아오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나 좀 쉬게 애 좀 봐줘.’라고 말도 못 하고 혼자서 밤새 끙끙 앓았더랬다. 이상하게 통증은 밤이 되면 더욱 심해졌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이와 둘이 덩그러니 있으니 서러움이 몰려왔다.      


 커-다란 섬에 아이와 나. 

 둘만 남겨진 느낌이었다.      


 그 날은 낮에도 그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 날 나를 통증과 외롭고, 서러운 커-다란 섬에서 구원해준 건 ‘엄마’였다.     

  ‘나의 구원자’는 전골냄비에 오리백숙을 옮겨 담고 보글보글 끓이다가 그 위에 부추를 가득 얹었다. 오리백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양조간장에 겨자와 다진 마늘, 고춧가루, 매실청을 넣고 양념장을 만들었다.      

 그 사이 나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꺼냈다. 

 쌀게 무침, 고들빼기 무침, 배추김치, 명이나물 절임, 딱 계란 4개가 남아 있는 계란장. 꺼내놓고 보니 내가 만든 거라곤 계란장뿐이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반찬을 직접 만들어 먹었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도무지 반찬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건 생각보다 많은 노동력과 집중력이 필요했고, 이유식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유식 만들기도 벅찼다.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반찬 만들 여유가 없으니 인터넷에서 대용량 반찬을 시켜 먹고 있던 터였다. 

 손님들 식사를 챙기느라 정작 본인의 끼니는 챙길 틈이 없는 엄마에게 반찬거리라도 싸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만든 반찬들을 좋아했다. 

 양손 가득 먹을 걸 들고 서울로 올라온 엄마를 빈손으로 보내기 아쉬워서 내가 만든 반찬들을 싸주곤 했었다. 깻잎 김치, 깻잎 장아찌, 매실 장아찌, 무말랭이, 볶음 고추장, 고추장 황태구이, 파김치 등등. 


 그러면 엄마는 몇 날 며칠이고, “네 덕분에 밥 한 그릇 뚝딱 비웠어. 너무 맛있는 거 있지?”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그게 좋았다. ‘반찬’은 내가 엄마,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들 중의 하나였다. 남들처럼 넉넉히 용돈은 못 줘도 맛있는 반찬은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는 반찬을 만들면 엄마와 아빠 몫까지 계산해서 만들게 됐다. 


 그중에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건 내가 만든 깻잎김치였다.     

 아쉬운 대로 명이나물 절임과 고들빼기 무침을 비닐봉지에 옮겨 담으면서 생각했다. 

 ‘이참에 깻잎 김치를 담가볼까?’     


 ‘깻잎김치’는 ‘할머니의 요리’였다. 

 할머니, 그러니까 아빠의 엄마이자 엄마의 시어머니인 ‘임홍례’씨는 요리를 좋아했고, 잘했고, 손이 컸다.

 명절이면 식혜, 송편, 만두, 약과까지 모두 손수 만들었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는 날이면 할머니는 상다리가 부러져라 음식들을 차려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어린 날에 나는 할머니의 집에 가는 게 좋았다. 

 할머니가 음식을 하는 동안 주방에서 서성이며 이런저런 일들을 돕는 것도 좋았고, 명절이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둘러앉아 떡을 썰고, 송편을 만들고, 전을 부치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았던 건 ‘할머니의 음식’이었다. 

 할머니의 음식에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맛’이 있었다. 그 맛이 세월의 맛인지, 손맛인지, 기가 막힌 MSG의 조합인지는 모르겠으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우리 가족 모두가 ‘할머니가 한 게 진짜 맛있었는데!’를 외치는 걸 보면 할머니의 음식은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입맛이 제각각인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제일 좋아했던 요리는 ‘깻잎김치’였다.  

 할머니의 깻잎김치는 매콤하고, 달콤하고, 짭조름한 양념이 깻잎에 깊게 베어 들어 따끈한 밥 한 숟갈에 깻잎김치 한 장을 얹어 먹으면 밥 두, 세 그릇 정도는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마법의 반찬’이었다. 


 엄마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우리의 저녁을 챙겨주지 못하는 날이면 ‘깻잎 김밥’을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곤 했다. 초등학생이던 그 시절에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동생과 마주 앉아 ‘깻잎 김밥’을 먹었다. 냉장고에 있었던 몇 시간 사이에 깻잎 김치의 양념이 하얀 밥에 스며들어 입 안 가득 퍼지던 그 짭짤하고, 매콤하고, 달큰한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맛있는 걸 먹으면 자랑하고 싶어 지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엄마가 깻잎 김밥을 만들어줬는데 엄청 맛있다! 다음에 내가 싸올게!”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친구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 싸 올 건데?”

 내 대답은 늘 같았다. 

 “소풍 가는 날!”


 친구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풍 가는 날 김밥 대신에 깻잎 김밥을 싸가지고 갔다. ‘깻잎 김밥’은 예상대로 인기가 좋았다. 깻잎 김밥을 들고 소풍을 다녀온 날이면 엄마에게, 충주의 할머니에게 ‘깻잎 김밥’의 인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 해. 할머니가 계속 만들어 줄게.”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깻잎김치를 언제고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당뇨로 고생하던 할머니는 한동안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의 명절은 갈수록 한가해졌다. 만드는 음식들이 하나 둘 줄었고, 해야 할 일도 하나둘씩 줄어갔다. 어두컴컴한 할아버지의 집이 더 어둡게 느껴지던 그때. 

 추석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려는 나의 조그마한 손에 할머니가 작은 통 하나를 들려줬다. 당뇨 합병증 때문에 퉁퉁 부어있던 할머니의 손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이제껏 만들어온 음식의 가짓수만큼이나 까칠하고, 주름져있었다. 할머니가 쥐어준 작은 통 안에는 깻잎김치가 들어 있었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깻잎김치였다. 

 할머니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니들 좋아하니까. 맛있게 먹어. 다 먹으면 또 해줄게.”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추석이 끝나고 3일 뒤 즈음에. 

 ‘깻잎김치’는 할머니의 마지막 음식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깻잎 김치 먹고 싶다. 할머니 깻잎 김치가 최고였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머니를 그리워했다.


 엄마는 몇 번인가 할머니의 깻잎 김치를 재연해보겠노라며 인터넷의 레시피를 참고해서 깻잎김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그 맛을 재연해낼 수는 없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할머니한테 깻잎 김치를 좀 배워둘걸 그랬어.”라며 아쉬워하곤 했었다. 


 ‘깻잎 김치’가 아쉬운 건 그날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날 깻잎 김치가 있었다면 엄마에게 깻잎 김치라도 한 통 싸줄 수 있었을 텐데. 깻잎 김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고들빼기 무침과 명이나물 절임을 덜어 조그마한 통에 담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거 가지고 가서 먹어. 인터넷에서 산 반찬이긴 한데 꽤 괜찮더라고.”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너희나 먹지. 뭘 이런 걸 싸주고 그래.”라고 말했지만 나는 줄 것이 그것뿐인 것이 한없이 아쉬웠다. 


 그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나 지금 끝났어. 장모님이랑 장인어른은 오셨어?”

 “응. 와 있지. 천천히 와.”

 “응. 이따 봐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오늘 그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러고 보니 남편과 거나하게 처음 만든 요리도 ‘깻잎 김치’였다. 

 ‘깻잎김치’를 담그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마트에서 깻잎이 세일 중이었다. 한 박스에 만 오천 원. 깻잎으로 뭘 할까 생각하다가 할머니의 깻잎 김치를 재연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깻잎 김치를 재연해 내고 싶은 건 거창하게 말해서 엄마와 나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날 나는 한 박스에 만 오천 원이라는 깻잎 앞에서 엄마와 아빠의 말을 떠올렸다. 

 “넌 요리에 소질이 있어. 할머니 손맛이 너한테 다 갔다니까. 손맛 하나는 최고야.”

 그리고 엄마와 나의 ‘숙원 사업’을 완수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두 박스의 깻잎을 주문했다. 


 집으로 배송된 깻잎 두 박스와 당근 한 박스와 양파 한 망, 홍고추를 보고 남편은 당황했으나 “할머니의 깻잎 김치를 재연해주마!”라는 나의 포부를 듣고, 모든 걸 내려놓고 깻잎을 씻기 시작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의 손발은 척척 맞았다. 

 늘 이렇게만 손발이 맞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함께 조그만 신혼집 거실에서 깻잎을 한 장, 한 장 씻고, 데치고, 물기를 닦아내고, 양파와 고추와 당근을 썰고, 고춧가루와 다진 생강, 다진 마늘, 매실청, 설탕, 진간장과 국간장, 양조간장, 멸치액젓을 섞어 양념장을 만들고 데친 깻잎 한 장 한 장에 곱게 양념을 입히고, 차곡차곡 김치 통에 쌓고 나니 하루가 갔다. 


 깻잎 김치를 처음 만들었던 그 날, 우리는 갓 만든 깻잎 김치로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의 맛과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긴 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깻잎 김치 담글만하네. 너무 맛있다.”

 그 날 입이 짧은 그가 밥 한 공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비우는 걸 보면서 나는 다시 ‘깻잎 김치의 마법’을 경험했다. 


 서울로 올라온 엄마와 아빠에게 깻잎김치 한 통을 건네면서 말했다. 

 “다 먹으면 또 해줄게.”

 그 날의 할머니처럼. 


 다음 날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와 ‘깻잎 김치’ 덕분에 밥맛이 살아났다고 좋아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엄마와 아빠는 늘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딸이 최고야! 어쩜 이렇게 음식을 맛있게 잘해? 네 덕분에 밥 꼭 챙겨 먹고 나오잖아.”

 손님들 끼니를 챙기느라 본인의 끼니를 챙기지 못하던 엄마와 아빠가 깻잎 김치 덕분에 끼니를 챙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행복했다. 늘 받기만 하던 내가 엄마와 아빠에게 두둑한 용돈은 아닐지라도 뭔가를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뿌듯해서 그 이후 몇 번 더 깻잎김치를 담갔다.     


 ‘나의 깻잎 김치’는 ‘엄마의 오리백숙’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깻잎 김치가 없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깻잎 김치 담그면 먹을래?”

 엄마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얘. 애기를 데리고 어떻게 깻잎 김치를 담가. 괜히 일 벌이지 말고 내비 둬.”

 “그래도. 엄마랑 아빠 좋아하잖아.”

 “우리는 알아서 잘해 먹으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몸이나 잘 추슬러.”

 엄마는 됐다고 했지만 나는 아쉬웠다.      


 내가 깻잎 김치를 아쉬워하는 사이 엄마의 정성이 담긴 오리백숙이 완성됐다. 

 엄마와 아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10개월이 된 아이와 작은 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먼저 진하게 우러난 오리백숙의 국물을 맛봤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약재와 오리 육수의 감칠맛은 일품이었다. 

 오리백숙의 국물로 입 안을 경건히 한 뒤엔 연하게 익은 오리고기를 아무것도 찍지 않고 먹어봤다. 연한 육질과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하고, 담백한 오리고기의 맛이 입안을 메웠다.  

 그리고 숨이 죽은 부추와 오리고기를 매콤하고, 짭조름하고, 달콤한 양념장에 찍어 입 안 가득 넣고 우걱우걱 씹으니 사라진 입맛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 날 나는 엄마의 오리백숙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밥까지 말아서 국물 한 점, 쌀 한 톨 남김없이 깔끔하게. 

할머니의 깻잎김치에 밥 두, 세 그릇을 뚝딱 해치우던 그때처럼.      


 수족구 때문에 입 안이 아파 아이스크림만 먹어 대다가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고 나니 힘이 솟았다. 엄마와 마루에 마주 앉아 늘 그렇듯 마지막 입가심으로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자 거실 소파에 드러누운 아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맙지? 그거 엄마가 밤새도록 잠도 못 자고 고생하면서 끓인 거야.”

 아빠처럼 장난스럽게 “알지. 오구, 오구. 우리 엄마. 고생 많았어.”라고 말하며 오랜만에 엄마의 주름진 손을 꼭 잡았다. 엄마의 손은 초등학교 5학년의 나에게 깻잎김치를 건네주던 할머니의 손만큼이나 까칠하고, 주름져있었다. 

 덥디 더운 8월에 열기로 가득한 주방 안에서 아픈 딸을 위해 밤새도록 오리백숙을 끓였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목이 메었다. 엄마는 무심하게 “그러니까 잘 먹고 빨리 나아. 그러면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지만 나는 엄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 날의 엄마에게서  

 그 날의 할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그날의 할머니와 

 그 날의 엄마를 닮아가는 나를 봤다.  


 우리는 이별을 경험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이별했던 누군가와 만나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내일은 깻잎 김치를 담가야겠다.  


남편과 함께 처음 담근 깻잎김치 
남편과 두 번째로 함께 담근 깻잎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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