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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 Oct 16. 2021

나의중동여행기50_깊은 물에 잠겼다

살려줘 헤엘프

유심데이터 쓰는 법을 마침내 알아냈다.

오만은 3G 환경인데 내 휴대폰은 LTE 환경으로 맞춰져 있어서 연결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3G 기지국밖에 없는 나라에서 LTE 기지국을 계속 찾았으니 연결이 안 되는 게 당연했다. 3G로 사용 모드를 바꾸니 바로 연결이 쭉쭉 됐다. 휴! 이젠 길 잃어버려도 덜 무서워할 수 있어.


오늘은 전날 신청해 둔 여행상품을 체험하는 날이다. 원래는 오만 여행의 목적인 바다거북 생태구역 `라 살 진즈'(Ras Al Jinz)로 곧장 가고 싶었으나 내겐 차가 없었고 무스카트에서 250km 떨어진(약 서울~구미 거리) 도시를 혼자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때 웹서핑하던 손가락에 걸린 것이 오만의 유명 계곡 `와디샵' 체험 상품이다. 라 살 진즈로 가는 길 한가운데쯤 위치한 자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식사를 하는 짧은 여행상품이었다. 그 상품을 이용하면 픽업 차량으로 중간 지점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물놀이와 식사 포함이라니 일석이조 아닌가!

가운데 '티위'(Tiwi)가 계곡이 있는 지점이다

어제 빨아서 말려둔 수영복을 주섬주섬 챙겨서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오늘부로 사흘 간 무스카트를 떠날 것이기 때문에 픽업차량이 오기 전에 체크아웃도 마쳐야 했다. 첫날 도착할 때 호텔직원에게 빌린(=택시기사에게 삥 뜯긴) 2리얄을 갚고 짐을 다 빼서 소파에 앉았을 즈음 호텔방에 빨아서 널어 둔 헝겊 생리대가 생각났다.


생리 시기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해서 빨아둔 건데 그걸 그대로 두고 오다니. 올라가서 가지고 오려 했으나 때마침 도착한 픽업차량이 밖에서 뛰뛰 경적을 울렸다. 방키를 받아다가 다시 올라가서 생리대를 가져오기엔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았다. 방을 청소하는 직원이 그걸 보면 얼마나 우스울까. 그 상황을 생각하니 나도 괜시리 웃음이 나고 미안하기도 했다.


픽업차량에 오르니 백인 할머니 네 명과 할아버지 한 명, 50대로 보이는 라틴계 부부 한 쌍이 타고 있었다. 차량 맨 뒤에 앉아 음성 가이드가 나눠주는 이어폰을 끼고 오만의 역사를 듣고 있자니 잠이 솔솔 왔다. 음성 가이드는 비교적 정확한 타이밍에 차창 너머의 풍경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석유를 발견하게 된 계기, 오만의 근대화 과정 등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차를 탔다
슝슝 달리는 봉고

다만 오디오 가이드가 말끝마다 "카부스 술탄 덕분에 우리 나라가 이렇게 잘 산답니다"(By the rule of Sultan Qaboos, our country flourished)라고 덧붙이는 건 좀 생경했다. 이렇게 대놓고 술탄 칭찬을 한다고? 여기 독재정권인가?


사정이 궁금해 찾아보니 과연 그렇다. 오만 사람들에게 카부스 술탄은 한때 아랍 최빈국이었던 오만을 현재의 동유럽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려 준, 근대화의 주역처럼 여겨진다고 한다.

한편으론1970년 영국 도움으로 술탄 자리에 오른 뒤 50년 동안 입법권과 사법권, 행정권을 모두 쥔 독재자로 지냈으니 국민들이 함부로 까 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2011년 아랍 전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 때도 즉각 경제정책을 펼쳐 여론을 잠재웠다고 한다.


깜빡 잠이 들었을 즈음 운전기사가 봉고 문을 열며 내리라고 했다. 캐리어는 내버려두고 따로 챙긴 수영복 짐을 챙겼다. 차에서 내리니 짐을 실은 당나귀들이 보여 요르단에서 호객행위를 당했던 안 좋은 추억(말 타! 당나귀 타!)이 떠올랐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배를 타고 들어가게 돼 있었다. 를 탄 할머니들은 신이 나는지 "호오우"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배에 내려서도 한참 더 들어가 계곡을 발견했다. 물이 맑았고 작은 물고기들이 여럿 보였다. 날씨가 좋아 안을 노닐기도 딱이었다. 다만 어느 계곡이 그렇듯이 갑자기 깊어지는 곳이 있었다. 이런, 이스라엘 자연온천 샤흐네에서 큰일날 뻔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데.

얕은 물은 이렇고
깊은 물은 이렇다

그 때 터득한 방법은 물안경을 끼고 자유영을 하다가 자세가 흐트러진다 싶으면 몸을 뒤집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나는 생존수영 가운데 기초인 입영(서서 하는 수영)을 못한다. 한국식 수영강습이란 자고로 자유영 배영 접영 등등 겨루기식 수영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하여 깊은 물 위에 떠 있으려면 반드시 자유영이든 배영이든 해서 어디론가 나아가야만 했다.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사달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얕은 계곡물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만 안쪽에 폭포가 있다는 소식에 그만 가 보고 싶어진 것이다. 먼저 다녀온 할머니들이 중간중간 수영해야 할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그것을 유념하며 수영했다.


어찌저찌 중간지점까진 잘 다녀왔는데 폭포가 나오기 전에 물이 아주 깊어지는 지점이 있었다. 전에 배운 것처럼 수경을 끼고 자유영을 해서 그 지점을 지나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수경 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말았다. 시야가 흐려지면 수영을 못하게 되는, 너무나 수영장 한정 수영인인 나로서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긴장하며 몸이 무거워지더니 가라앉기 시작했다. 원래 세운 원칙대로라면 배영을 해야 하는데 패닉이 와서 몸을 뒤집을 수가 없었다. 죽을 지도 몰라.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자존심을 버리기로 했다. 물을 박차고 나가 수면 위로 올라가 `헤엘(프)'하고 외치고 다시 꾸루루룩 잠수하고 다시 발장구를 쳐서 `헤엘(프)'를 외치고 다시 꾸루루룩 가라앉는 일을 반복했다. 주변에 있는 유럽인들은 수영을 너무 잘하는 나머지 쟤 왜 저래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헤엘프에서 거의 헤밖에 못하고 가라앉으려던 순간에 어떤 사람이 내 팔을 잡더니 끌어냈다. 팔에 이끌려 가다 보니 발을 딛을 수 있는 바위가 나왔다.

바닥이 안 보이는 물

"괜찮은거야? 바닥이 좀 깊긴 하지."

콜록거리는 나를 걱정해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운 마음에 올려다보았는데 한 라틴계 남자가 말로는 괜찮냐면서도 낄낄 웃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유럽인들도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살아난 것이 다행이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너무 창피하여 숨고만 싶었다. 으이구 어디 가서 수영한다고 하질 말아라!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탱큐, 탱큐 하고는 되돌아서 가려니 이번엔 유럽인 여자애가 가까이 온다.

"혼자 갈 수 있는거야? 수영할 수 있어? 내가 같이 가 줄게."

아니, 아니야 괜찮아. 나 너무 창피해 지금.

"응, 할 수 있어. 저기 얕은 데로 갈게."

그 여자아이는 걱정된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결국 중간쯤까지 바래다 주었고 나는 수영을 1년 반 배웠으나 다른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수영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물에 처박고 싶었다.


얕은 물에 도착해선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물고기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얕은 데에 오니 심신이 안정되어 훨씬 재밌게 놀 수 있었다. 그래도 멀리서 깊은 물로 풍덩 다이빙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너무 부러워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생존수영을 배우리라.

요즘엔 그래도 초등생 대상으로 생존수영을 가르치는 곳들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초등생 여러분 저처럼 창피 당하지 않게 많이 배워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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