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못하는 부사수'를 이제야 만났다
올해로 일한 지 9년 차다. 적지 않은 연차임에도 항상 일 잘하는 사람 하고만 일을 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몸소 깨닫고 있다.
지금 회사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부사수가 있다. 이 분은 내가 지금까지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달리 '일머리'가 없다. 어렵지 않은 일을 요청해도 결국 내 손을 거쳐야만 마무리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그러다 보니 동시다발적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아질수록 내 업무 로드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냥 내가 해버리자'의 마인드는 장기적으로 나와 내 부사수 모두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말이다.
이번 주 팀장님과의 1:1 면담에서 부사수와 일하면서 힘든 점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같이 일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팀장님은 지금까지 팀을 운영하면서 봤던 가장 좋은 방법을 알려주었다.
팀장님의 조언은 "전에 같이 일했던 부장 A가 사원 B를 참 잘 키웠었는데"로 시작했다. 부장 A는 매일 아침마다 셀에서 해야 할 일을 페이지로 정리했다고 한다. 정리한 페이지를 보며 사원 A가 그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브리핑하고 그 안에서 본인이 할 것과 부사수가 할 일을 나눴다고 한다. 부사수가 할 일의 데드라인은 실제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시점보다 하루 빠르게 세팅하며 타임라인 매니징도 놓치지 않았다고. 사원 A는 이렇게 캠페인의 시작부터 끝까지 몇 번의 사이클을 돌았고, 나중에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알아서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맥락을 잘 설명해 주는 사수라고 생각했었는데, 팀장님의 조언을 듣고 생각해 보니 지금의 부사수와 일할 때는 내가 혼자 달리다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만 그때그때 말로 설명한 게 전부였음을 깨달았다. 팀장님과 면담을 마치자마자 아래 내용을 메모해두었다.
[이렇게 일해보자]
- 페이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먼저 쭉 정리를 해놓고 (프로세스 매니징)
- 내가 해야 할 일과 부사수가 해야 할 일을 나눠주고 (업무 분배)
- 부사수가 맡고 있는 업무의 진행 과정과 결과물의 퀄리티를 같이 챙기면서 (중간보고 과정)
- 우리 둘이 팀으로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나와 부사수의 동반 성장)
부사수의 '일하는 역량'을 떠나서 '일을 대하는 마인드'를 보면서도 좀 힘이 빠진다는 내 말에 팀장님은 '다른 사람의 애티튜드는 애초에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그런 거에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조언도 주셨다.
나는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고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내 부사수는 나와 일을 대하는 온도차가 많이 다르다는 걸 같이 일하면서 여러 번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을 내가 키워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장으로서 우리 셀의 일이 잘 굴러가도록 하는 건 내게 주어진 임무다. 일잘러로 키워야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없어도, 내 부사수가 적어도 1인분의 역할은 해낼 수 있도록 옆에서 이끌어주는 건 내 몫이란 말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일에 서툰 부사수를 만난 게 지금의 나한테 필요한 경험인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경력이 더 쌓여서 덜컥 팀장이 되어버리면 또 어떻고. 일하는 역량도 성향도 다 다른 팀원들을 이끌고 가야 하는 시기도 분명 올 텐데. 그래서 나는 지금의 이 경험을 팀장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일 잘하고 마인드 좋은 사람들과 일을 할 때도, 일에 서툰 부사수와 일하고 있는 지금도 다 내 성장에 분명 밑거름이 된다.
다음 주부터는 이 마인드셋을 실행으로 옮겨봐야겠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내 업무용 노션 페이지 외에, 내 부사수와 함께 볼 수 있는 노션 페이지를 하나 더 만들어봐야겠다. 팀장님의 조언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일정과, To-do list , 우선순위, R&R 을 쭉 정리해서 공유해야지. 조만간 일에 서툰 부사수를 키운 나의 경험담과 그렇게 좀 더 성장한 나를 기록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