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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화자 Aug 24. 2022

글 쓰는 할머니의 이야기  59

춘천 감자

춘천 감자 

                                                             신 화 자

 이른 봄에 감자 싹을 본 것 같은데 벌써 햇감자 철이다. 감자는 비를 맞으면 더운 날씨에 잘 썩는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뽀송뽀송 잘 여문 감자를 넉넉하게 사다 놓아야 마음이 놓인다.

 "감자가 크지도 않았고 잘 안지를 않았어요." 

워낙 가뭄이 심했던 터라 감자농사가 잘 안 됐단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웬걸 씨알 굵은 감자알이 튼실하다. 경상도에서 택배비 물어가며 감자를 사 간다고 농부가 자랑하듯 한 말은 거짓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 분의 성실함을 잘 아는 터라 감자 두 상자를 샀다. 중간크기 감자 한 보따리와 조림용 작은 감자 한 봉지를 덤으로 얹어 준다. 집안에 들어 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붙잡는 걸 간신히 뿌리쳤다.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사는 농촌의 인심은 아직도 넉넉하다. 

 신매리와 장학리는 춘천시의 외곽 농촌마을이다. 하일은 장학리쪽 지명이었는데 하일 고구마가 유명했었다. 너른 들판에서 농작물이 자라던 한적한 마을 장학리에 빌딩들이 들어서고 길이 넓어졌다. 큰 다리가 생기면서 교통이 좋아졌다. 장학리가  신도시처럼 변하면서 ‘하일 고구마’가 잊혀지고 있다. 신매리는 요즘도 감자와 김장채소들을 잔뜩 키워내고 있다. 봄에는 감자꽃을, 가을에는 김장배추와 무밭이 북한강변 길가에 펼쳐진다. 서면의 신매리와 월송리는 이웃한 동네다. 월송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 월송리 감자 맛에 푹 빠져서 햇감자를 넉넉하게 사다 놓고 흐뭇해한다. 

 7, 8월은 습기 많고 무더운 계절이다. 더운 몸들은 서로 마주 닿으면 열을 받아서 감자들도 병이 난다. 땅 속에서 몸을 만든 감자는 햇볕에 노출되면 푸른색이 되고 파랗게 된 감자는 아린 맛이 나고 독성을 품기 때문에 서늘하고 어둡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거나 햇볕을 가려준다. 팍신하고 반짝반짝 분이 나는 감자 맛이 좋아서 한 며칠은 계속 감자만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중간크기 감자를 북북 문질러 껍질을 벗긴다음 소금을 살짝 뿌리고 압력솥에 찐다. 잘 익은 감자들이 뜨거운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뜨거운 감자와 시원한 오이냉국은 궁합이 잘 맞는다. 가짓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의 덩이줄기채소인 감자는 오염되지 않은 땅의 기운과 태양의 정열이 빚어 낸 건강한 먹거리다. 

  찐 감자를 먹으면 6.25피난 시절 생각이 난다. 1950년 7월은 칠십 여 년 전이다. 햇 감자 나오고 햇 보리쌀 먹는 무더운 여름 장마철이었다. 6.25 전쟁 피난길에서 찐 감자와 고추장을 함께 먹었던 어릴 적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추장은 불그레하고 보리 밥알이 덜 삭아서 몽글몽글 씹히면서 메주냄새가 많이 나는 낯설고 거친 음식이었다. 궁핍했던 시절의 음식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휴전이 될 무렵에는 함경도 할머니 한 분이 더부살이로 살림을 도와주며 함께 살았었다. 그분의 함경도식 감자음식 메뉴는 다양했다. 감자를 갈아서 전을 부치고 떡을 만들고 범벅과 수제비도 만들었다. 전쟁 직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쌀이 귀했을 것이다. 옥수수밥을 질리도록 먹은 것도 그때였다. 감자와 옥수수는 그 한 해 여름 구황식품이었다. 

 감자와 밀가루와 강낭콩이나 완두콩을 넣은 감자범벅은 특히 강원도 사람들의 별식이었다. 경기 민요중에 범벅타령을 들어보면 일 년 열두 달 범벅이 빠지지 않는다. 범벅은 옛날부터 우리 생활에서 친숙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 이월 개춘에 시래기범벅/ 삼월 삼일에 쑥범벅/ 

  사월 파일에는 느티범벅/ 오월 단오에는 수리취범벅/

  유월 유두에 밀범벅이요/ 칠월 칠석에 호박 범벅이요/

  팔월 추석에는 송편범벅이요/ 구월 구일에 귀리범벅/

  시월 상달에 무시루범벅/ 동짓달에는 새알심범벅/ 

  섣달에는 흰떡범벅/정월에는 꿀범벅/ 』 

 계절에 따라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은 모두 범벅이 되었다. 야채이거나 나물이거나 두루뭉수리로 곡물가루와 함께 버무려서 익히면 범벅이 되었던 것이다.  

  감자범벅은 껍질 벗긴 감자와 강낭콩에 적당한 양의 물을 붓고 소금 살짝 뿌려주고, 밀가루를 적당히 버무리거나 반죽을 하고 얇게 빚고 뜯어서 감자위에 얹는다. 압력솥 뚜껑을 덮고 익히다가 약한 불로 10분쯤 뜸을 들이고 나서 잘 익은 감자를 푹푹 으깨고 강낭콩과 밀가루 반죽을 고루 섞어서 그릇에 담으면 감자범벅은 요리 완성이다. 감자의 구수함과 밀가루 쫄깃함과 강낭콩의 담백함이 서로 어울린 맛이다. 간소하지만 포만감 가득한 감자로 밥상을 차려놓고 보니 유월에는 ‘감자범벅’이라고 범벅타령을 고쳐 부르고 싶어진다. 옛날에 식량이 부족해서 일상으로 먹어야 했던 이들에게 범벅은 구황식품이었을지라도 먹거리가 넘쳐나는 이 시대의 범벅은 추억의 별식이다.

 햇감자와 햇 강낭콩은 봄에 거둔 첫 곡식과 채소다. 하늘과 땅과 땀 흘린 농부에게 추수감사가 아닌 춘수감사라도 올리고 싶어진다. 포실포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햇감자로 만든 감자범벅에는 오이냉국이 제격이다. 감자는 따뜻하게 오이냉국은 시원하게 먹는 것이 포인트다. 만들기 쉽다. 보기보다 훨씬 맛나다. 감자범벅과 오이냉국은 꾸밈은 전혀 없지만 입맛 당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입맛은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단순하고 투박하게 생긴 감자는 고향처럼 순수하고 정겨운 맛이다. 

  감자바위라고 하면 강원도 사람들을 비하한다고 발끈하던 때가 있었다. 감자가 바위처럼 묵직하고 무던해서 든든한 것처럼 강원도의 인심은 무던하고 구수하다. 소박한 듯 투박해서 바위처럼 표현은 없지만 속이 깊어서 믿음직하다. 강원도와 감자는 존중받고 사랑 받을 만하지 않은가. 감자처럼 되바라지지 않아서 투박하지만 웅숭깊음! 그 안에 감춰 진 속 깊은 사랑과 인정(人情)이 강원도 사람들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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