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책 |
내 나이 70세. 30년 지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알게 된 건 중학교 때였지만, 실제로 친구가 된 건 마흔 살 때이다. 마흔 어느 날, 우산도 없이 비 오는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난 외상 후스트레스장애로 자살 충동에 휩싸여 있었다. 한강으로 갈까, 옥상으로 갈까, 번개탄을 살까. “병신,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나는 나를 욕했다. 그때 땅이 커질 듯한 천둥소리와 함께 바로 앞, 은행나무 위로 벼락이 떨어졌다. 너무 무서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온몸이 얼어붙어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찰나, 공유를 닮은 천사가 내 앞에 나타났다.
“크리스티나, 슬퍼 말아라. 하느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공유를 닮은 천사는 B612호로 가는 길을 알려줬다. B612호에 나의 평생지기가 될 친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친구는 아기 피부같이 희고 고운 얼굴을 가졌다. 검은 눈동자는 장미꽃에 관해 얘기할 때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말할 때 목소리는 아주 편안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스르르 잠이 올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불면증으로 고생한 날이면 친구 찬스를 썼다. 친구는 꽃을 가꾸며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하지만, 나의 방문에 싫은 내색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코코아를 탄 보온병, 무릎담요 2개, 블루투스 스피커, 윤도현 1집을 챙겨서 B612호로 갔다.
“너랑 같이 해지는 거 보고 싶어서 왔지.”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날이구나.”
무거운 얘기도 가볍게 받아주는 친구에게 대답 대신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진청색 하늘이 핏빛에서 연보라색으로 연보라색에서 연회색이 될 때까지 말했다.
“초등학교 때 말이야, 집안 형편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걸 마음껏 꿈꿨다면 어땠을까? 상고 졸업해서 적당히 돈 벌다가 시집가는 게 꿈이었잖아. 공부 너무 잘하면 대학에 가고 싶어질까 봐, 적당히 공부한 거 그게 제일 후회돼. 어차피 대학에 갈 거였는데. 진즉에 진로를 정하고 목표를 향해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면 말야. 뭔가 막혔을 때 돌파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췄을지도 모르지. 엄마한테 떼라도 한번 써봤다면 말야. 싸우는 것보다 포기하는 걸 택하지 않았다면 말야. 포기하는 게 습관이 되지 않았다면 말야. 도망치는 게 습관이 되진 않았을 거야. 대학교 2학년, 나를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그때 생긴 외상 후스트레스장애로 이렇게 고통받진 않았을 거야.”
“그럼 가서 되돌려. 뭐가 문제야.”
은행나무가 벼락을 맞은 날, 공유를 닮은 천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나를 어여삐 여겨서 내리는 선물이라며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초능력을 줬다. 그 초능력이란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다음 날, 진짜 천사가 맞다면 진짜 초능력이 생긴 게 맞다면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사쿠타로와 아키의 고향인 아지쵸 마을을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아키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서 있던 방파제에 서 있었다. 얼떨떨했다. 꿈일 거야 하며 체코 스트라호프 수도원 도서관을 생각했다. 1501년에서 1800년 사이에 발간된 20만 권에 달하는 고서들이 내뿜는 책 냄새가 훅 폐 속을 파고들었다. 설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을 생각했다. “자화상” 앞에서 3시간을 서 있는 동안 나는 내 능력을 실감했다. 미술관을 나오니 지는 해가 고운 빛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2002년 3월, 논현동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싸우고 있는 남, 녀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아린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에게 여자는, 아니 나는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순간을 돌린다고 해도 헤어질 사이는 헤어지게 된다는 걸 마흔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로또 1등으로 모은 종잣돈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주식투자를 해서 번 돈으로 종로, 을지로, 세종로, 태평로, 테헤란로, 서초대로, 도산대로, 올림픽대로의 모든 건물을 사서 엄청난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고리대금으로 허덕이는 가장들, 홀몸 어르신, 고아, 희소병으로 아픈 사람에게 익명의 후원자가 되어 모두 쓰고 있다.
그래도 나는 허허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다.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건 좋은 사람과 나누는 유대감에서 나온다. 나는 그 유대감에 취약하다. 성장기에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결과라서 하느님이 나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여도 어쩔 수 없는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겉도는 나를 발견하면 몸속에 사리처럼 밖인 상처가 온몸을 찔러댄다. 그런 날, 이 친구가 있어 내가 산다.
“안 바꿔. 순간순간의 내가 너를 만나게 한 이유일 테니까.”
“해지는 거 한 번 더 볼래? 아님, 지구별 볼래?”
“지구별!”
“나는 내 친구 생텍쥐페리와 여우와 너가 있는 지구별이 참 좋아. 네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너 안에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거야. 그러니까 너 별로 빨리 돌아가. 하하하~”
내 친구 어린 왕자와 나는 무릎담요를 덮고 윤도현의 사랑 TWO를 들으며 김이 나는 코코아를 호호 불면서 지구가 대한민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체코로, 체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돌 때까지 영롱한 푸른빛을 감상했다.
이문재 시인은 "독자가 시를 이어 쓰게 하는 시가 좋은 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읽는 이로 하여금 글을 읽은 후 글을 이어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중학교 2학년 때 만났다.
어린 왕자는 슬플 때면 지는 해를 바라봤다. 중2병에 걸린 단발머리 소녀는 지루한 국어 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며 지는 해를 44번이나 본 날은 얼마나 슬펐을까, 생각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어서일까.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어린 왕자"는 내 곁에 있었다. 중2병의 방황, 첫 직장 퇴사의 좌절, 대학입시의 압박, 첫사랑과의 이별, 나이 들어 타성에 젖었을 때, 동심을 잃어버린 것 같은 회한이 들 때마다 꺼내 읽으면, 그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책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의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은 슬플 때면 어린 해지는 걸 보러 어린 왕자에게 간다. 삶의 굽이굽이를 힘들게 넘을 때마다 "어린 왕자"를 읽으며 언젠가 나도 어린 왕자와 같은 희망을 주는 글을 써야지, 하는 꿈을 꿨다. 그런 지금, "어린 왕자"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글을 이어 쓰고 있으니, "어린 왕자"야말로 내 인생을 바꾼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