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허기]
진부한 사랑 타령
심각성은 뱃살에서 드러났다.
어느 날, 이유 없는 짜증이 계속 났다. 꽉 조이는 바지가 문제였다. 그러더니 하나, 둘 맞지 않는 바지가 늘어갔다. 불편한 바지를 더는 참을 수 없어 아울렛으로 갔다. 살을 빼서 입겠다는 의지가 백기 투항한 것이다. 눈에 차는 건 역시나 비쌌다. 눈은 어느새 여러 옷이 쌓여있는 매대로 향했다. 문제는 사이즈가 없는 데 있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집에 가려는데 크로커다일 매대가 눈에 띄었다. 베이지색 모직 반바지는 아주 시원해 보였다. 1만 9천 원. 피곤함을 한 방에 날려버릴 득템의 기회였다.
- 사이즈 있어요?
파리해 보이는 점원은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성의 없이 있다고 말했다.
- 치수는요?
나는 살이 쪄서 모르지만 29 아니면 30인데 일단 29로 달라고 했다. 점원은 무심한 손길로 바지를 건네곤 갈아입는 곳을 가리켰다. 맞겠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허벅지에서 올라가지 않았다. ‘30으로 달라고 할걸...’ 힘들 게 입은 만큼 힘겹게 벗은 후, 기죽었지만 기죽지 않았다는 투로 30 사이즈를 요구했다. 그 바지가 꼭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점원이 사이즈를 확인하면서 하나씩 바지를 넘길 때마다 ‘툭툭’ 거친 소리가 났다. “없어요.” 흠.. 그래도 바지를 사야 하지 않나! 나는 옆에 있는 같은 소재의 긴 바지를 가르치며 말했다.
- 이건 사이즈 있어요?
- 있는 데 발목이 좁아서 불편할 거예요.
‘불편한 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나는 언짢은 걸 참으며 30으로 달라고 했다. 발을 집어넣는 건 어렵지 않은데 발목이 꽉 끼는 바지. 그 바지가 그랬다. 엉덩이만 펑퍼짐한 스키니진 같군. 요상한 모직 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으니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옷이 문제야, 아니면 내 몸이 문제야?
- 무슨 말씀인 줄 알겠네요.
어깨에 힘을 빼고 옷을 건네는데 점원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죽을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기가 솟았다. 디자인이 같은데 남색인 반바지를 보고 말했다.
- 이건 사이즈 있어요?
- 없어요.
찾아보지도 않고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입을 앙다물었다. 진상 고객이 된 기분이었다. 아마도 수치심이었을 것이다. 수치심이 분노가 되어 폭발하긴 전에, 진상 고객이 갑질까지 꼴값한다는 소리를 듣기 전에,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꾹 참으며 매장을 나왔다.
예쁘지는 않아도 늘씬한 몸매가 자랑인 나였다. 44 사이즈라서 안 팔린 옷을 착한 가격에 사서 입는 재미는 쏠쏠하게 즐겼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여가를 즐겼다. 그런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오랜만이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 못해 가슴께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처음엔 불친절한 점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화가 났다. 자기 관리 못 한 나. 문제를 알면서도 방치한 나. 나.나.나. 다 내 탓 같았다.
나는 다이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아무리 먹어도 살찌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런 이유로 때를 가리지 않고 먹었다. 야식의 짭짤한 맛을 어디에 비할까. 걱정 없이 야식을 즐기다가 점점 살이 불어난 건 작년 9월부터였다. 이상하게 밤만 되면 허기가 졌다. 딱히 배고픈 건 아닌데 뭔가를 자꾸 찾게 되면서 몸무게가 늘었다.
치킨, 삼겹살, 감자탕. 치킨에는 맥주가 빠질 수 없었고 삼겹살에는 소주가 딱 이었다. 얼큰한 감자탕에는 소맥이 제격 아닌가. 1차 소주, 2차 맥주, 3차 노래방에서 맥주, 4차 해장국집에서 소맥. 야식으로 먹는 안주가 좋았던 것인지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밤새도록 먹고 마셔도 허기는 도돌이표를 찍기 일쑤였다.
햇살 좋은 4월의 넷째 주 월요일에 그를 보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셔댔는지 그가 떠난 후에 알았다. 그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의 자리엔 늘 술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가장 반짝일 때 다가와서 그림자만 남겨놓고 달아난 그. 이상한 건 그가 떠났는데도 잘 먹고 잘 잔다. 일도 잘하고 놀기도 잘한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밤마다 허기가 진다는 거였다. 신진대사가 떨어져서 다이어트도 힘든 나이인데 이러다간 비만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아울렛을 나오는데 J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왕 간 거, 몇 벌 사지.” 속 모르는 말에 참았던 분통을 터트렸다. 엉뚱한 언니가 화풀이 대상이 됐다. 그날 밤에는 가위에도 눌렸다. 밤새 시달리고 일어나니 J 언니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나 정도면 보통 체형이라고. 니가 그러면 살찐 여성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고. 자본주의 사회, 여자를 상품화하면서 내놓은 미의 기준에 다들 미쳐 돌아가는데 너만은 자존감을 갖고 당당해지라고. 옷 한 벌 호기롭게 못 사주는 대신 가방을 줄 테니 마음 풀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후, 언니는 아끼던 가방 9개를 줬다. J 언니는 9개월 동안 나의 모든 술주정을 받아준 술친구였다.
가방을 받아 오던 날, J 언니는 살이 찐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찐 몸만 탓한다며 나를 다독였다. 그러고 보니 날 위한다고 살 빼라는 사람 중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걱정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그랬다. 내 몸인데 살찐 몸은 내 몸이 아니라는 듯이 행동했다. 밤마다 허한데 왜 허허로운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를 잘 보내주고 나면 예전의 내 몸매로 돌아갈까? 아니 지금의 몸매, 아니 더한 살이 쪄도 나를 좋아라 해주는 사람. 그런 그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내가 되면 밤의 허기는 사라질까. 왠지 그때가 더디 올 것 같다.
이 밤, 겨자 맛이 코를 쏘는 냉면이 먹고 싶다.
- 2015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