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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영 Aug 29. 2020

시금치 구하기

늘봄농장 시금치 50킬로를 구하라!

"늘봄 농장 알지요? 시금치 50킬로가 있는데 써볼 생각 있어요? 시금치로 우리 토요일 행사 전에 간식거리를 만들어 올 수 있을까요?"

두물뭍 농부시장 담당자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그럼요, 늘봄 농장 알아요. 전에 야무진 양파 사서 잘 먹었어요. 시금치는 페스토 만들면 되니까 저도 2킬로라도 살게요. 그리고 제가 일하는 식당에서 시금치를 쓰는데 한번 물어볼게요."

 폭우를 맞은 시금치들은 뿌리 쪽이 다 녹아버려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전에 급히 수확해서 저온 창고에 보관했던 아이들을 더 이상 저장할 길이 없어서(급하게 번지는 코로나로 인해 농부시장도 잠정 중단된 상황이고) 판매하시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는 무농약도 아닌 관행농 시금치가 200그램에 5000원에 육박하는데, 유기농 시금치가 300그램에 3천 원이란다. 이렇게 싸게 사도 되는 걸까 죄송할 정도의 가격이다.   

 유기농 시금치니까 왠지 억세고 크지 않을까, 시금치는 추울 때가 단 게 아닐까, 여름 시금치라서 맛이 없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에 잠시 사로잡혔지만, 막상 품에 안은 시금치는 아름다웠다. 잎이 부드럽고 맛도 순하디 순한, 어린잎이 아닌데도 생으로 먹을 수 있는 그런 고마운 시금치였다.

 시금치로 만드는 첫 번째 음식은 엠빠나다empanada이다. 요리학교 시절, 마을 축제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엠빠나다를 만들어 팔아서 졸업 여행을 갔던 흐뭇한 기억이 있다. 사과주를 코인지 입인지 모르게 들이붓는 술 취한 사람들이 뻗는 손에 엠빠나다 하나씩 쥐어주던 기억. 몇십 판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많은 엠빠나다를 만들기 위해 서로 이 레시피가 낫다, 왜 전통 엠빠나다에 이탈리아 발사믹 식초를 넣느냐, 반죽 두께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적당한가, 엄청나게 싸웠다. 행사 당일에는 학교에서 차로 태워다 주지 않을까도 했지만, 학교 주방에서 마을 광장까지 힘들게 만든 엠빠나다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야 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엠빠나다는 사라졌고, 우리는 고대했던 방학을 맞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부터 엠빠나다를 뭔가 많은 수의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야외에서도 별 도구 없이 먹을 수 있는, 호불호가 심하지 않은 그런 무난한 음식으로 여기게 되었나 보다.

 시금치가 모처럼 충분하니, 잎을 충분히 볶아서 부피를 줄이고 맛을 진하게 하는 사치를 부린다. 1킬로나 되는 시금치가 딱 국 두 그릇 크기로 줄어든다. 시금치의 들큼한 맛을 보완해줄 시큼한 크랜베리와 케이퍼도 넉넉히 넣고, 잣을 넣으면 더 좋을 텐데 하면서 얇게 저민 아몬드를 넣는다. 기후변화로 잣의 작황이 좋지 않아 잣의 가격이 많이 올랐다. 엠빠나다 반죽은 굉장히 투박하다. 프랑스 제과에서 처럼 바삭하게 하기 위해 차가운 버터를 잘게 잘라 사블라쥬Sablage를 한다던지 그런 디테일은 절대 없다. 버터를 녹여 반죽에 냅다 붓는다. 최대한 빨리 뭉쳐서 반죽이 안정되게 잠시 둔다. 

 반죽을 밀어 펴는 시간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출점해왔던 시장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행사나 클래스 기회가 막히면서, 내 일이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일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로 고집스럽게 맨당에 헤딩하기를 무려 8년째(헉!) 해나가고 있는 나를 자책하게 되더라.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나 자신이 참 괜찮다고 여겨진다. 한 조각에 3천 원, 이 엠빠나다를 먹을 21명을 생각하면 난 역시 쓸모 있는 사람이 맞다. 

 얇게 편 반죽에 시금치 소를 두껍게 올리고, 삶은 달걀을 군데군데 올린다. 퍽퍽하게 익은 완숙 달걀을 죄악시하는 것이 조리 상식이지만, 푸근한 시골 음식 티를 내려면 삶은 달걀도 필요하다. 소와 반죽 사이에서 접착 역할을 하는 치즈도 좀 올리고 다시 반죽으로 덮는다. 숨구멍을 좀 내주어야 파이 안에 증기가 차서 부풀어 오르거나 축축해지지 않는다. 엠빠나다의 사방을 잘 여미어 준다. 남은 반죽 자투리로 원하는 문양을 빚어 올려도 좋다. 달걀물을 고루 바르고, 오븐에서 아래위가 노릇해질 때까지 굽는다. 다 됐다. 꺼내서 잠시 식힌 후, 한 조각 잘라 맛을 본다. 얇고 바삭한 겉면이 좋다. 그런데 맛이 좀 심심한 것도 같다. 훈연 파프리카 가루Pimenton을 듬뿍 뿌려 개성을 살려 본다. 

 차 트렁크엔 뜨거운 오븐 트레이에 그대로 담긴 엠빠나다가 실렸다. 도착해선 굉장히 부끄러워하면서 어디 귀퉁이에 엠빠나다를 가져다 놓는다. 사람들은 "이게 뭐예요? 엠빠나다? 엠빠나다 맞아요?" 이름을 자꾸 되물어 가면서 맛있게 먹는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농부님은 시금치를 심으셨고, 시금치는 땅에서 자랐고, 나는 요리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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