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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소영 Mar 13. 2018

요리하는 여자로 살아남기

식당 주방은 터프한 남자의 공간이라는 견고한 환상에 맞서

저는 왜 한국에서 요리를 시작하지 못했을까요?


고백하건데 남자의 세계, 군대식 상하복종 문화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나무위키도 요리사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덥고, 흡연자에게나 위험한 줄 알았던 폐암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데다가, 군대식 서열문화가 확립되어 있고, 전망도 썩 좋지 않은' 직종.

평소 규칙을 잘 지키는 성격이지만, 그 규칙에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엔 저항심을 마구 뿜어내는 서른 넘은 여자가 버틸만한 세계인지, 아니 그 세계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는 건지 조차 의문이었지요. 

막연히 성격차지수가 한국(2015년 세계경제포럼 발표 기준, 115위) 보다 무척 높은 스페인(25위)은 사정이 좀 낫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도 그 장벽을 피할 수는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1

식당에서 가끔 학교 정규 과정인 실습 외에 주말이나 휴일에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동일한 업무를 같은 시간에 하는데도 다른 동기 남자 실습생보다 현저히 낮은 임금(여기에는 인종적 차별도 더해진 것 같다.)을 주더라고요. 그 식당의 다른 요리사들도 업무 능력과 헌신도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2

졸업 전 3개월 동안 풀 타임으로 일한 식당에는 40년 넘게 일한 여성 요리사와 2년 정도 일한 남성 요리사가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40년 경력의 여성 요리사가 이전 식당에서의 경력을 합치더라도 10년 미만인 남성 요리사와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여성 요리사는 초대 셰프의 레시피를 전수 받은 사람이었고 지금도 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식당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 사람은 남성인 헤드 셰프입니다.


#3

헤드 셰프가 여성인 식당은 스페인에서도 보기 힘듦니다. 제가 실습을 거친 7개 레스토랑 중 여성이 헤드 셰프인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고기, 생선, 가드망제(찬요리, 샤퀴테리), 엉트레(달걀, 채소), 디저트 등 모든 파트가 중요하지만 보통 서열이 낮은 디저트나 가드망제, 엉트레는 여성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아이가 있는 여성 여성 요리사는 더욱 보기 힘들었습니다. 스페인의 'Top Chef'라는 전문 요리사 경연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이자 미슐랭 별점을 받은 Susi Díaz라는 여성 요리사가 보육과 식당일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울음을 터뜨리는 짠한 장면을 본 적도 있었습니다.


#4

제게 씌워진 여자, 덧붙여 동양 여자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주방에서 종종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약하고 순종적일거라는 생각, '연약한 네가 이런 거친일을 할 수 있겠어?' 라는 편견. 이걸 깨기 위해서 일부러 무거운 쓰레기 자루를 자청해서 들어보이기도 하고, 불 앞에서 냄비나 프라이팬을 더 팍팍 돌리기도 하고, 평소의 나라면 절대 못했을 일들-산비둘기 털 뽑기, 돼지 귓속 털 제거하기, 살아있는 가재 숨통 끊기-을 아무렇지 않은 척 해내고, 제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히기도 하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남성 요리사들은 이런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감히?' 하는 식의 살짝 분노 어린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하면 시간이 갈수록 어렴풋이 느껴졌던 남성 요리사의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나 완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는 성적인 농담의 횟수가 적어졌던 것 같습니다. 저를 또한 불편하게 했던 것은 몇몇 한국 남성 요리사들의 시선이었다. 요리사 경험이 없는 제가 학교나 실습지에서 좋은 평을 들으면 제가 동양 여자라서 기준을 낮춰준 것이라든지, 저를 한 번 꼬셔보려는 것 아니겠냐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여성 셰프 분투기'라는 책을 보니 미국도 이런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 노동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요리 산업 내에서 셰프와 헤드 쿡 중 여성은 오직 20% 뿐입니다. 미국의 상위 15개 레스토랑 그룹에서 일하는 헤드 셰프 160명 중 여성은 고작 6.3% 뿐이었습니다. 여성 CEO 비율이 전체 CEO의 24%를 차지하는(이 조차도 충분히 여성 대표 과소 문제를 제기할만한 수치이지요.) 미국에서 말입니다. 얼마나 여성 셰프가 귀하면 전 세계 레스토랑 랭킹 중 하나인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는 여성 셰프 상을 별도로 마련할 정도입니다.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전문 요리사들은 거의 남성입니다. 전문 요리 교육을 받은 여성은 전문 요리사보다는 요리 연구가나 푸드 스타일리스트 등 다른 관련 직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성이 전문 셰프직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를 '여성 셰프 분투기'에서는 초기 셰프들이 자신의 업무와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요리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미식의 장 내 영향력이 있는 단체-요리학교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여성을 배척한 데에서 찾습니다. 재화의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화를 두려워한 남성 셰프들이 취한 전략입니다. 미디어는 전통에 도전하고 오로지 자신의 커리어에만 헌신하는 남성 셰프를 자주 비춥니다. 가치있는 요리 유형에 대한 문화적 판단도 남성에게 유리합니다. 재료를 기르고 고르고 담아 숙성하는 장 담그기 과정을 현란한 칼질과 불질, 플레이팅으로 휘리릭 완성된 한 접시 만큼 매력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여성은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레스토랑의 주방 문화에서 '타자'로 지명되어 그들의 '형제'가 되기위해 비슷한 행동 유형을 취하거나, 그들의 결점을 껴안는 '엄마'의 역할을 도맡습니다. 그녀 있는 그대로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출산을 하는 경우에는 좋은 노동자이자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합니다. 주방의 공간에 젠더 통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쌓아올린 요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전문 요리사의 영역에서 여성이 하는 요리는 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할까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엄마든 아빠든 딸이든 아들이든 누군가 만든 가정 요리는 왜 전문 요리와 비교하여 기술적으로라 예술적으로나 낮은 수준으로만 인식하는지 궁금합니다. 출산을 했든 하지 않았든 여성 요리사도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며 전문가로 성장해나가고 인정받는 전문 요리사의 장이 형성되기를 소망합니다. 식당 주방은 터프한 남성만의 것이 아니라, 요리를 사랑하는 모든이의 것이라고 함께 목소리 내고 싶습니다. 함께하실래요?


***


상그리아 Sangria


상그리아는 스페인으로 상그레(Sangre), '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마도 붉은 색상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나봐요. 와인에 과일, 향신료를 넣어서 재워먹던 풍습은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답니다. 언젠가 모두를 위한 주방에서 상그리아로 축배를 들기를! 


작년 마르쉐 출점 때 만든 마하키친 상그리아. 마르쉐 인스타그램에서 가져왔습니다.


재료

오렌지(이왕이면 국산 청견) 1개, 계피 한 대, 그린 카다멈 2알, 딸기, 수박 등 계절과일  200g, 설탕 4큰술, 소금 한 꼬집, 캄파리 15ml, 레드와인 250ml, 오렌지 탄산 음료 250ml, 얼음, 다시팩


과정

1. 오렌지는 반달 모양으로 슬라이스하고 딸기와 수박 한입 크기로 썬다. 계피와 카다멈은 망치로 부수어서 다시팩에 넣는다. 뜨거운 물을 약간 부어 우린다.

2. 병에 오렌지, 계피, 카다멈, 설탕, 소금, 캄파리, 와인을 넣고 주걱으로 살살 으깬다. 계절과일을 넣는다. 이 상태로 상온에 1시간, 내기 전날 밤 냉장고에 둔다.

3. 내기 직전 오렌지 소다를 붓고 얼음을 넣는다.


캄파리와 와인을 넣지 않고, 과일 주스나 탄산 음료와 섞으면 무알콜로도 즐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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