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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드 Nov 10. 2018

“엄마 보고 싶다”의 의미.

봉황을 찾는다.

점심을 엄마랑 먹었다. 계획하지 않은 일정이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온 엄마의 일이 일찍 끝나, 내가 먼저 함께 점심을 먹자 제안한 것이었다.


아주 정확히 건물 이름과 주소를 알려드렸지만, 엄마는 왕창 헤맸다. 나는 점심시간을 길게 쓸 물리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아니야, 핑계다. 그냥 어디 계신지 몰라 답답했다. 핸드폰도 있는데 엄마처럼 스마트폰 잘 쓰는 사람이 왜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냐고 전화로 짜증을 부렸다. 나야말로 우리 가족 중 가장 심한 길치고 지금 건물로 회사가 이사 왔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길을 잘못 들었으면서!


내 짜증을 잔뜩 듣고도 엄마는 날 만나자마자 너 그렇게 입고 춥지 않으냐며 자신의 스카프를 건넸다. 그리고 “우리 딸이랑 점심 먹으니까 좋네~”하면서 웃었다. “너 먹고 싶은 거 사주러 왔지.”라는 엄마에게 은근슬쩍 탕수육을 제안했지만, 우리는 시래기를 먹었다. 엄마와 나는 소화 기능이 똥망이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외가 내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외할머니도 외할머니의 큰딸인 엄마도, 엄마의 큰딸인 나도 고기류나 튀김류, 투머치 탄수화물을 먹으면 자주 체한다.


점심 먹는 내내 엄마는 내 칭찬을 했다. 동생 취업 준비를 도와주어 고맙고 네가 큰아들처럼 든든하다며. (아니 큰딸도 든든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머니!) 시래깃국의 값은 엄마가 냈다. 나는 "엄마, 나 엄마가 산대서 카드 아예 들고 오지도 않았어"라고 화답했다. 엄마랑 먹을 땐 그래도 되는 거라고 엄마가 응했다. (부자엄마최고)


매운 것도 못 먹는 주제에 칼칼한 거 시켜서, 엄마가 자기 밥 나눠주심


엄마와 헤어지고 나니 오후가 되었다가 금세 또 저녁이 되었다. 고 몇 시간 사이에 나는 몇 번 작게 짜증이 났고 소소하게 체했으며 한 번 훅, 하고 시련을 겪었다. 짜증과 체기와 시련은 사실 같은 말이다. 하고 싶지 않은 걸 해야 했거나, 혹은 하면서 깨달았다는 거다. 아, 나, 이거 이렇게 하고 싶지 않구나. 나 지금 뭔가 참고 있구나.


자려고 세수하다, 문득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건가 싶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랑 있고 싶다는 거. 오늘 점심에도 봤던 엄마를 또, 내 눈앞에 다시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짜증 내도 받아주고 먹고 싶은 거 해주고, 그렇다고 내가 재료비를 내지도 공임을 내지도 않고, 나만 먹었는데 설거지도 내가 안 하고. 피곤할 텐데 그냥 얼른 씻구 자라고, 너무 피곤하면 하루쯤 안 씻어도 괜찮으니 그냥 자라고 해주는 비현실적 존재가 필요하다는 거, 그게 엄마 보고 싶다는 말의 '의미' 아닐까.


(당연히) 그런 사람은 없다. 무조건적으로 날 사랑해주는 사람. 사랑까진 아니어도, 수용해주는 사람. 사람은 각자의 예민함에 둘러싸여 살고 내 예민함의 가시는 눈 가린 채 남의 가시들만 겁나게 지적하면서 지내니까. 가끔은 애인이, 도파민이 가득한 초반 두세 달엔, '조건 없는 사랑의 존재'를 자임하기도 하지만 당연히 호르몬 빨이다. 그런 거에 서운해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는 먹었다.


이제 오랜 단짝 친구에게도 무조건적 수용을 요청하지 않는다. 내가 손꼽는 정말 친한 친구들은 한 번씩 소위 '쌩깠던' 친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정말 친한 친구'인 거다. 우린 서로가 말도 안 되는 가시를 가진 걸 안다. 그렇다고 그걸 품어줄 능력은 없다. 그러니 그 블랙홀을 살살 피해가며 만난다. 제일 보잘것없고 재활용도 안 될 것 같은 내 모습은 일기장에 숨기는 거지 술 먹고 징징거리며 친구한테 보여주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애인도 아니고 인생 친구도 아니다.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예뻐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통에 어떤 대승적인 인간이 그렇게 해줄까. 보통의 날들에 이런 비현실적 기대는 속 깊이 접어놓는다. 야, 정신 차려라. 하면서 자신을 혼내기도 하고. 


그런데 유난히 속 쓰린 날이 있다. 한 번 체할 걸 두 번 체하는 날. 이상하게 홍조가 더 많이 돋았던 날. 그런 날은, 현실에 없는, 봉황이나 유니콘 같은 존재를 찾는다. 그리고 그 존재는 종종 엄마로 치환된다. 아, 엄마 보고 싶다.


(길잃어서 많이 걸었더니 더운) 미녀


(길잃어서 많이 걸었더니 덥지만) 말하는 미녀


현실의 엄마도 사실, 봉황과 유니콘은 아니다. 현실의 엄마가 예수 or 부처가 되는 건 우리가 가끔만 만날 때다. 아니면 현실의 엄마께 여유가 있고 나도 과하게 투정하거나 찡얼거리지 않을 만큼의 양심이나 의식이 있을 때. 그럴 때 엄마는 신 or 전설적 존재가 되고 나는 감사하며 머리 숙이는 신도가 된다.


우리 봉황 여사는 강남까지 행차하시느라, 더 늙어 자식들한테 고생 안 하게 하려면 근육이 필요하다며 PT를 받으시느라 오늘 아주 고단하셨나 보다. 낮잠을 주무셨다는 데도 겁나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오래오래 봉황과 유니콘, 위대한 모성의 원형('prototype')을 이기적으로 바랄 수 있도록 지치지 마시고, 아프지 마시길  회도 고기도 많이 드실 만큼 튼튼하시기를. '딸 보고 싶다'는 의미도 이렇게 갑자기 느끼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아 이런 썸네일로 올리면 혼날 거 같은데... 브런치도 썸네일 고르게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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