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드 Sep 05. 2018

내 취향의 여행을 한다는 것

[미 서부 1탄] 샌프란시스코에서 의도적으로 시간 낭비하기.

여기는 샌프란시스코! 한국에도 곧 1호점이 생긴다는 ‘블루 보틀 커피’에 앉아있다. 

귀국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은 금쪽같은 시간에, 나는 노트북을 챙겨 나와 굳이 여기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들어올 땐 정장 차림의 남녀가 굉장히 많았는데! 사람이 많이 빠진 정오 즈음.


오늘 아침 통화를 하는 중 조금 투덜투덜거렸다. 


“한국에 있으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는 그래도 푹 쉬었을 텐데. 출장부터 오늘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돌아다니려니 너무 힘들다. 사실 지금 한 이삼 주째 주말이 하나도 없는 거잖아?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면서 쉬고 싶어.”


“그럼 그냥 빈둥거리면 되잖아”


“하지만 소살리토도 가고 싶고 여기 아직 못 본 데도 많고... 시간이 아깝긴 한 걸.”


“음… 내 여행은 항상 빈둥빈둥거리는 건데. 그냥 빈둥빈둥거려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거렸다.’ 멋있는데?”



나는 한국에서도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편이 아니다. 맛집에 별 관심 없고 소위 ‘힙’하다는 곳들은 북마크&저장만 해둘 뿐, 실제로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를 만날 땐 귀찮아서 멀리 나가지 않는다. 즐겨 찾는 곳은 한강이나 저렴하고 메뉴가 잡다하게 많은 집 앞 카페. 주말에 약속이 없으면 하루 종일 침대에 등을 붙이고 책을 보다 자다 글을 쓰다가 또 자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을 보다가 책을 보다 밀린 일기를 쓴다. (한마디로 집순이)


그런데 여행을 오면 이상하게 자꾸 계획에 파묻히게 된다. 공식적인 출장 일정이 끝났던 금요일, 자정쯤 집에 들어와 일을 마무리하니 새벽 한 시. 그때부터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해 끝내니 새벽 세시였다. 주어진 자유의 5일을 가장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빡빡한 스케줄을 짜고 대중교통을 숙지하고 날씨를 보면서 어느 날에 무슨 옷을 입을지를 정해 적어뒀다. 


며칠 이렇게 스스로 부여한 일정에 따라 살다 보면 몸의 반응이 달라진다. 오늘 아침에 정말 일어나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보통 하루 5시간 정도 자는 내가 7시간을 잤는데도 얼굴이 부어 있었고 심통이 일었다. 여행을 왔다고 ‘Must See’와 ‘Must Eat’ 같은 곳을 찾아다니는 게 정말이지 맞지 않았다는 거다. 

물론 이것도 성격이다. 어차피 싫어할 걸 알면서도 하루하루 미리 계획 짜고, 자기 전 내일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두는 것도, 예약까지 다 마쳐야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내 성격이니 어쩌겠었는가. 이 성격을 끌어안으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계획을 짜는 보금도 내버려두고, 다음 날 그 계획을 따르기 싫어하는 보금도 내버려두는 거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의 보금이 짠 계획을 내다 버리고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했다. 


그 충동의 결과가 여기, 이 시간이다. 굉장히 일찍 일어났지만 아침 열 시까지 숙소를 청소하고 짐을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는 무거운 맥북 프로를 짊어지고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하러 왔다. 


이건 순전히 내 취향의 여행이다. ‘내 취향’의 ‘여행’이란 이런 거다. 한국의 일상 속에서 하기 좋아했던 것들을 하되, 샌프란시스코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더욱 특별하게 누리는 것 말이다. 


예를 들면, 

평소 하고 싶었던 것처럼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있기. 근데 샌프란시스코의 블루 보틀이나 필즈에서. 

관심 있는 기업의 사옥 구경하고 거기 다니는 사람이랑 밥 먹으면서 일 얘기 하기 

한국에선 ‘혼맥’했던 시간에 캘리포니아 와인으로 ‘혼와’ 하기.

한국에선 비싼 식재료를 숙소 앞 마트에서 사기 (unsweetened 바닐라맛 아몬드 밀크 같은...?)

1849년에 지어진 Grace Cathedral*에서 예배드리기. (이거 참고로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았다.)

1849년에 지어진 성공회 교회로, 샌프란시스코 관광 명소이자 미국에서 3번째로 큰 성공회 교


사실 최근 몇 년간 나는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다. 같이 가는 사람들만 나한테 의미가 있지 여행 자체는 즐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행지에선 항상 피곤했고 돌아와서도 피곤했다. 짐을 싸고 푸는 게 진짜 아주 귀찮았고 비행기 타는 것도 노잼이었다. 그렇지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는 날씨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을 올렸고 여행은 역시 자랑하는 맛인가 하면서 다녔다. 별 관심 없지만 다들 좋다고 하는 관광지를 꼭 가고 yelp 상위의 음식점들을 갔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과 구글을 몇 개월간 넘나들며 핸드폰 지도 앱에 수백 개의 별표를 쳤다. 맛있다는 추천에, 예쁘다는 추천에, 싸다는 추천에 얼굴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추천에 별은 끝없이 번식했고 어느새 은하수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그만 블랙홀에 빠져버렸다. 동방박사도 아니면서 별을 따라 목적지에서 목적지로만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여행을 잃어버린 것이다.”


-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 중


여행에 다양한 모양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내 취향의 여행을 하며 ‘시간 낭비’ 하는 것도 괜찮다고 그게 오히려 더 ‘알찬’ 여행이라고 스스로에게 더 일찍 알려줬더라면 지나간 국가와 도시들이 더 기억에 남았을 텐데.


다음 여행에선 동방박사 별 찾기 여행은 조금 줄여 보려고 한다. 성격상 계획을 짤 수밖에 없다면 ‘시간 낭비’하는 시간들을 아예 계획에 넣어 버릴까 한다. 아마 다음 여행에선,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카페에 앉아 핫스폿을 연결해 노닥거리거나 글을 쓸 것 같다. 주일이 되면 동네의 오래된 교회가 어딘지 검색할 거다. 돌아오는 길엔 마트에서 그 지역의 맥주나 와인을 고르고 다음날 아침으로 먹어야지 하고 사과나 바나나도 몇 개 살 거다. 물론 밤에 야식으로 먹어버리겠지만. 스타트업이나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을 만나면 또 신나게 떠들 거고 그 대화를 일기장에 옮길 거다. 


아직 나는 내 여행의 취향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몇 가지 어렴풋이 알게 되어 다행이다. 다음 여행은, 하루하루 참 쓸데없는 여행이면 좋겠다. 누가 거기 간다고 했을 때 보편적으로 추천해줄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으면 더 좋겠다. 그러면 충분히 즐거울 것 같다.


City Lights Bookstore. 책 한 권쯤 사고 싶었는데 만만한 걸 찾지 못했다.
오트밀과 맛없는 아몬드 밀크.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에어비앤비 엔지니어 친구가 구경시켜줬다. 사진을 3천장쯤 찍었다. 헿.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보고 싶다”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