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울고있는땅콩 Feb 06. 2021

장마

장마, 창문이 소란스러워지는 계절이 왔다.


 사계절을 그렇게 성실하게 돌았으니, 일 년에 한 번쯤은 쏟아내야 하겠지. 몹쓸 부스러기들을 쓸어내고 마른자리 적셔가며, 지난 시간을 다지는 것일까 다가올 뜨거움을 예열하는 것일까. 지구를 씻어내고 식히는 이치로 보면 아주 오래전엔 한 해의 시작이 여름이었을 수도 있겠다.


 예년에 비해 유난스러운 장마였다. 떠나간 구름 중 못 잊을 한 점이 있었던 것인지, 빗방울은 더욱 무거웠고 불어오는 바람은 보다 거칠었다. 비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많았는데, 장마를 좋아한다는 사람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장마가 오지 않으면 생기는 탈 때문에 자못 기다리면서도, 누구도 마음을 주려하진 않으니 그간의 꾸준했던 길들이 얼마나 쓸쓸했을까. 장마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거리를 감싼 무채색이 짙어지는 것이 외로움의 농도 같게만 느껴져 자꾸 창 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항상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 것, 마르지 않는 빨래를 신경 써야 하는 것, 금세 헝클어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자주 매무새를 챙겨야 하는 것, 하늘을 방심했다 썩 당혹스러워지는 순간이 생기는 것, 깊은 밤의 생각들이 낮으로까지 넘쳐흐르는 것들이 불편해서 싫다고 했던가. 오히려 나는 그런 제약을 좋아했다. 제한이 생겨 일상의 음정이 전조轉調되고 귀찮은 일들이 많아지는 계절, 그 때문에 장마를 기다린다. 우산을 들어 손이 모자라지는 일, 평소보다 조금 더 길어지는 기다림, 비라는 핑계로 흐트러짐을 괘념치 않는 태도, 예상 밖으로 엎질러지는 일상, 온종일을 밤처럼 보내는 하루들이 좋았다. 그 불편함이 편했다. 긴 시간 떨어진 비 덕택에 물길을 피해 조심스럽게 걷게 되니까.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길로 조금 돌아가는 일이 잦아지니까.


예상치 못한 비, 하나밖에 없던 우산 덕에 당신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어.



 내가 가진 어제들이 잿빛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먼지 같은 일조차 지구의 무게처럼 여기던 시절. 유별나게 앓으면서도 한 번 속 시원히 쏟아내진 못했더랬지. 내가 배운 세상이 그랬다. 잘 우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막상 터져버린 사람의 등짝엔 유약함이나 동정 같은 단어들을 낙인처럼 새겼으니, 눈물과 멀어지는 일이 잘 사는 방편인 줄로만 알았지. 우는 일은 장마 같은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장마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이었을까.


 비가 많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Y는 누구보다도 잘 우는 사람이었다. 우는 일에 망설임이 없었고,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눈물을 지어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게 울었다. 슬퍼서 울었고, 아파서 울었고, 때로는 기뻐서 울기도 했다. 어찌 그리 태연한 마음으로 울 수 있는지 물으니, 그저 웃는 만큼 많이 우는 것일 뿐이라고 답을 했던 사람. 그이는 우기와 건기로 한해를 가르는 도시에 살지만 여덟 개 정도의 계절을 사는 것 같았고, 남들보다 곱절쯤 많은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무채색에 살기에 더 많이 채색된 사람. 그이는 우리가 지닌 백 개 정도의 표정 중 열 개쯤은 눈물에 뿌리를 둔 것일 거라고 했었다. 그러니 눈물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우는 것도 그저 하나의 표정일 뿐이라고. 그 말 앞에서 나는 그만, 눈이 많이 매워졌더랬다. 장마엔 차라리 울 준비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싶어서.


그즈음부터였어, 내가 장마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





[사진 : 강릉, 대한민국 / 바르셀로나, 스페인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 인천, 대한민국]

매거진의 이전글 재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