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워킹홀리데이 #12 런던 테러, 찾아온 일상
나는 런던의 람베스라는 지역에 산다. 빅벤과 웨스트민스터까지는 걸어서 넉넉잡아 20분. 테러가 발생한 날 일을 하러 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서 브런치에 글을 좀 쓰고(워킹홀리데이 매거진 10장, 런던 날씨에 관한 글이었다), 올여름에 할 여행 계획도 짜고, 국외 부재자 신청을 해야 런던에서 선거를 할 수 있다길래 그것도 알아보고 신청을 하고, 무엇보다도 차를 홀짝이며 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더랬다. 그러다 세시가 좀 안되어 카페를 나섰다. 브런치 글에 써 내렸던 대로 비가 막 그치던 차였고, 아침부터 뭘 많이 먹어 소화가 안 되는 바람에 가게까지 걸어가려는 생각이었다.
집에서 가게는 도보로 한 시간 정도, 날씨가 좋으면 걸어가기에도 부담이 별로 없는 거리다. 우리 펍으로 가기 위해서는 빅벤, 트라팔가 광장, 피카딜리 서커스 같은 런던의 명소들을 지나기 때문에 걷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이 모든 장소를 지나치기 전, 정확히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지나야 한다.
이 날 비가 막 그친 시원한 바깥공기에 기분 좋게 웨스트 브릿지로 향하고 있었다. 카운티 홀을 지나서 브릿지로 진입하려는데, 이상하게 앰뷸런스랑 경찰들이 많다 싶었다. 코너만 돌면 빅벤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랐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길을 가로막고 배리어를 치더니 여기로 못 지나간다고 사람들을 가로막았다. 물론 나도 포함. 무슨 일인가 싶어서 BBC를 켜보려는데 그것보다 옆 사람들에게 묻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옆 사람을 붙잡아 'Do you know what happened?(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하고 물으니 shots(발포)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이유를 설명해줬다. 내 머릿 속은 shots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패닉. 총? 총격이라도 있었나? 혹시 테러? 머리가 하얘졌다. 급하게 BBC를 들어가 살펴보니 계속해서 사건 정황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한 자동차가 브릿지를 통해 사람들을 마구 치고 다니며 국회의사당 입구로 돌진했고, 그 차에 치인 여성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 그대로 입구를 들이받고 차에서 내린 테러범이 비무장 경찰을 찔러 경찰관도 사망하고 말았고, 테러범은 무장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단다.
카페에서 몇 분만 일찍 나왔어도 저기에 휘말릴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조금만 내가 일 가는 길을 서둘렀다면? 평소보다 조금 더 내가 부지런했다면? 테러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내가 자주 지나다니고, 사랑하던 그 브릿지에.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일을 하러 튜브를 타기로 결정했다.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겠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초조했는지 손톱도 아니고 핸드폰을 엄청 깨물었다.
람베스 노스라는 역에서 튜브를 탔다. 튜브가 너무 조용했다. 괜히 그렇게 느끼는 건 줄은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조용하고, 그래서 스산했다. 가게에 가서 겪었던 일을 설명하니 다들 날 토닥여줬다. 이 날은 가게 지하에 큰 이벤트가 있을 거라 스태프들도 매우 많이 일하러 올 예정이었는데 그 큰 이벤트가 이 사건 때문에 취소되고 말았다. 오피스에 가니 매니저들이 심각한 얘기로 오늘 테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고 말이다. 런던에서 테러라니. 유럽에 많은 큰 도시들이 있지만 런던은 그래도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이벤트 취소 때문에 가게는 정말 한적했고, 난 덕분에 일찍 집에 왔다. 내가 람베스에 사는지라 웨스트민스터랑 굉장히 가까운데(걸어서 15분 정도) 이 날 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사이렌 소리가 엄청나게 들렸다.
한국은 새벽이라 소식이 느렸고, 아침에도 마침 세월호 인양 날짜와 겹쳐 큰 소식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외국 친구들에게 괜찮냐는 안부 연락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리고 그중 인상 깊었던 게 있다면, 외국 친구들의 연락은 'Be strong'으로 대부분 마무리 지어졌다는 것.
'Keep calm and carry on'
'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
영국 정부가 세계 2차 대전 중 공중 폭격이 예고된 상황에서 국민들에게 던진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지금도 런던의 모든 시민들에게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우리가 테러를 두려워하고 일상을 외면한다면 그게 바로 테러리스트가 바라던 대로 되는 꼴이라나. 테러 당일 'how are you?'라는 한 친구의 질문에 'still in shock(아직도 충격에 잠겨있어)'라고 대답했었다. 그러자 'Be happy, that's the only way we can be against terror(행복해져. 그게 우리가 테러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테러 직후 다들 혼란스러워했던 것도 잠시, 런던에 곧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이 내렸다.
자칫했다가는 무슬림 혐오로 번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 인종주의자들이 테러를 계기로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들은 '그러면 안된다'고 단호히 얘기한다. 테러 다음 날 맥주 한 잔을 시킨 손님이 한 얘기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런던의 면모는 diversity(다양성)이야. 테러리스트 하나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고 사랑하는 이 도시가 더럽혀져서는 안 돼. 언제나 그랬듯 런던은 어떤 사람이 어디 출신이든 환영할 거야.'
테러로 인해 5명이 사망, 40여 명이 다쳤다. 혹자는 '사고의 규모가 작아서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르겠다. 이유 없이 죽고 다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숫자로 하는 셈이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일이다.
어제 탬즈강 주변으로 조깅을 하러 갔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는 차도와 인도 사이에 철제 배리어가 쳐졌고, 국회의사당 주변 전부도 까만 배리어로 입구를 꽁꽁 막아놨더라. 그리고 사고가 일어난 근처에는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꽃다발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가 평소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웃고, 사랑하고, 또 웃고. 하지만 우리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희생자들에 대한 슬픔이 없는 건 아니다. 가령 지나가다가 사고 현장을 본다든지, 다시금 뉴스를 접한다든지, 비슷한 사고가 난다든지(실제로 며칠 뒤 테러는 아니었지만 차량 돌진으로 인한 사고가 또 발생했다) 하면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에 찰나의 숙연함, 슬픔 같은 것들이 번진다. Carry on,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는 것이 사건이나 피해자들을 깨끗이 잊어버리겠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하기에 펑소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잠깐 멈춰서 희생자 모두가 어디선가 평온하길, 더 이상의 테러가 없길 손 모아 기도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