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여행
첫 째, 다시금 ‘영국 날씨’라는 게 뭔지 실감하다
아니 어쩌면 스코틀랜드는 더 북쪽이라 내가 있던 런던보다 더 할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남부에서 해가 따사롭다 못해 따갑다고 느꼈다. 피부도 생각보다 많이 탄 건 물론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해를 좀 안 봐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에든버러 오자마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가랑비도 아닌 우산을 써야 할 정도의 비가 말이다. 역시 영국이다 싶어 웃음이 나왔지만 해가 지겹다고 불평했던 불과 며칠 전의 나 자신도 우스웠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호스트 집을 찾아가고 있노라니(에든버러에서는 카우치 서핑을 했다), 해가, 아니하다 못해 그냥 비가 안 내리는 흐린 날씨라도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비가 내렸고, 마침내 저녁에 구름이 걷혔을 때 잠깐 몸에 닿는 햇살의 온기에 이런 불평이 함께 녹아 사라지긴 했지만 역시 해는 그냥 얼마간 고개를 빼꼼하고 곧 약을 올리듯 다시 숨어버렸다.
둘째, 그래도 소통이 가능하다는 기쁨
프랑스에서는 사실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해서 정말 살아남기 위한 대화만 할 수 있었다. 안녕, 미안해요, 이거 얼마인가요 정도? 그래, 딱 저 세 마디 할 줄 알았다. 그냥 들어간 맥도날드에서 직원과 소통이 안 되어서 한참 애를 먹기도 했으니 사실 참 불편했다. 그래서 그런지 에든버러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에서 들리는 영어 안내말에 안도의 숨을 폭 하고 내쉬었다. 런던에 머물면서는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사실은 영어를 이만큼이라도 하는 걸로 인해 편했던 것들은 생각도 못하고 불평불만이었구나 싶었다. 당장 에든버러서부터 현지인이 말을 걸어왔을 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 말 그대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 사실 스코틀랜드 악센트가 낯설어서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중세 시대를 걷는 듯한 느낌
사실 나는 2년 전에도, 올해에도,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유럽의 분위기에 무뎌진 게 없지 않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 발을 디딘 나라가 네덜란드였는데, 그때는 하루에 3만보, 4만보고 발이 닳아라 걸어 다니며 작은 골목골목 하나에도 경탄을 금지 못했다. 첫 나라, 첫 감흥이란 게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유럽만의 분위기에서 감동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수십 개의 성당을 봐서 그런가 그 성당이 그거 같고, 거리와 골목도 그게 그거 같다. 하지만 에든버러에 오는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림에도 불구하고 에든버러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간 봤던 섬세하고 화려했던 성들과는 달리 우직하게 언덕 위에서 있는 에든버러 성은 애초에 군사 목적으로 지어져 투박하지만 굳건해 보이는 맛이 있었다. 그 성부터 홀리루드 하우스까지 이어져 과거에 귀족들만 지나다닐 수 있었다고 하는 로열 마일, 그 사이사이로 작게 작게 나 평민들이 살고 다니던 클로즈 등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어 매력적이었던 길들, 구시가지에 인구가 넘쳐 프린세스 스트릿을 경계로 18세기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신시가지까지, 짙은 빛깔의 이 도시를 거니노라니 마치 중세시대에 온 기분이었다. 신시가지라고 불리는 곳이 18세기에 지어졌으니 에든버러 전체가 얼마나 고풍스러운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거다. 거리를 걷는 내내 다른 곳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취하기 좋은 도시
스카치의 원조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 온 이상 다양한 위스키를 맛봐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혀서 여기저기 펍을 다녀 위스키를 맛보기 시작했다. 일단 펍에 들어가면 어느 곳이든 위스키 메뉴가 따로 있었고, 런던보다도 술 값이 훨씬 쌌다. 그뿐인가, 대부분에 펍에서 학생 할인 20%~ 30%가 가능했다. 위스키 맛을 알기에는 아직 달고 짠 걸 좋아하는 애 입맛인지라 위스키는 몇 번 시음을 시도하고 포기해야 했지만, 학생 할인 덕에 매일, 아니 몇 시간마다 펍에 들러서 맥주는 꼭 한잔 씩 한 것 같다. 맥주와 함께 먹는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하기스’도 별미였다. 하기스는 소와 돼지 내장을 오트밀과 함께 섞어 만든 음식. 얼핏 듣기만 하면 역할 것 같지만, 으깬 감자와 위스키 소스와 함께 조금씩 곁들이니 그렇지도 않다. 곱창이나 순대 맛과 조금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생전 맛본 적 없는 질감이긴 했지만 하기스 한 입에 맥주 한 잔, 이런 식으로 홀짝홀짝 술을 입에 대다 보니 가게 문을 나설 때는 똑바로 걷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아야 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에든버러
나는 높은 곳을 참 좋아한다. 높은 곳에서 탁 트인 도시 풍경과 하늘을 바라보자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에든버러는 런던과는 다르게 언덕들이 많았다. 개 중에 ‘Author’s seat’ ‘과 ‘Carlton hill’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단연 압권이다. 낮에는 아서스 시트(Author’s seat)에 먼저 올라갔다. 여기는 에든버러 시내와 거리가 꽤 있고,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시간을 꽤나 투자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다들 만만하게 보고 올라갔다가 보통 뒷 일정을 포기하고 곯아떨어진다고 한다. 내가 아서스 시트에 간 즈음에 가벼운 비까지 내렸고, 결과적으로 나는 비를 맞으며 힘겹게 올라갔다 그만큼 다 올라갔을 때 보람도 컸지만, 다 보고 나서는 정말 호스텔에 가서 곯아 떨어졌다. 나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낮잠을 자서 체력을 보충해야 했던 거다. 어쨌든 언덕에서 본 흐린 하늘과 갈색, 혹은 짙게 탄 빛의 에든버러의 건물들이 정말 잘 어울렸다.
칼튼 힐(Calton hill)은 에든버러 신시가지 동쪽 끝에 위치해있다. 계단과 언덕을 꽤 올라가다 보면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같은 기념비가 나오는데, 사실은 정말 그걸 모방해서 지은 게 맞다. 올가가기도 힘들어 보이는 이 기념비 위에 어떻게들 올라간건지, 다들 삼삼오오 올라가서 쉬고 있었다. 나는 올라가지 않고 대신 쭉 걸어가서 에든버러 전경 보는 걸 택했다. 아까 낮에 아서스 시트에 올라갔을 때보다는 날이 개였고, 아서스 시트보다는 낮은 곳이라 좀 더 화창하고 가까운 전망으로 에든버러를 조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서스 시트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일단 덜 힘들고, 이렇게 가까이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내가 도시와 더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아서스 시트에서보다 칼튼 힐에서 조금 더 멈춰 서서, 앉아서, 걸으며, 오랫동안 에든버러 시내를 내려다봤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