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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Jun 18. 2017

촌동네 히치하이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히치하이킹을 하다


중학교 시절, 우리 학교는 산골짜기에 있었다. 사실 내가 살던 동네도 촌동네였는데, 그 촌동네 사람들이 우리 중학교 교복만 보면 촌뜨기들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웃어댔으니, 가히 우리 중학교는 어느정도의 산골에 위치해 있었는지 짐작이 갈 거다. 지금 기억에도 뱀이며 온갖 새 종류는 학교 다니며 다 본 것 같고, 교실 창문에 벌집이 달리는 건 물론, 학교 뒷산에 도롱뇽이 나타나 짓궂고 어렸던 남자애들이 도롱뇽 알을 가끔씩 채집해와 가지고 놀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 얘기를 갑자기 왜 풀어놓냐면은, 이런 산골 구석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마을 버스 종점은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곳. 거기서 내리더라도 30분은 족히 더 걸어야 학교에 도착했다. 친절하게도 버스 회사와 학교가 합의를 봐서 등 하교 시간에 맞춰서 버스 3~4대씩만 학교 바로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배려해줬는데, 그래서 그 버스들에는 소위 콩나물 시루처럼 학생들이 그득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친구랑 등교를 같이 할 거랍시고 일찍 나와도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한참 기다리다가 지각하고, 그렇게 지각을 하면 반성문을 쓰느라, 벌 청소를 하느라 또 학교 문을 늦게 나섰다. 벌을 받지 않는 날에도 띵가띵가 친구들과 텅 빈 교실에서 놀다가 늦게 하교하기도 일쑤였고. 그래서 난 보통 학교 앞까지 들어오는 버스를 타지 못했다. 하지만 난 운동과는 담 쌓고 지내던 사람이라, 걷는 것도 무지 싫어했다. 그리고 어린 만큼 겁이 없었다. 그래서 자주 히치하이킹을 했었다.

하교 길, 친구들과 우루루 교문 밖을 나서면 주위에 보이는 건 끝 없는 들판,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우리 학교 뒷산 정도. 그 허허벌판을 걸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다 뒤에서 차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전투 태세를 취했다. 손을 차도 쪽으로 쭉 내밀어 휘휘 저으면서, 운전자를 보며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게 바로 그것. 15살 남짓의 나는 부끄러울 것도 없었나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학교가 있던 산골짜기에 좋은 사람들만 날 태워준건지,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한 번도 위험한 적은 없었다. 트럭 뒤에 친구 8명이서 무릎을 웅크리고 다같이 실려서 시내까지 나가 보기도 했고, 고급 승용차를 어쩌다 탔더니 우리 학교 선배님이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했었다. 트럭 같은 걸 타고 근처 버스정류장까지 나가는 날이면(주위가 농촌이어서 트럭이 꽤 많은 까닭에 이런 날이 한 번이 아니고 자주 있었다.) 학교서부터 걸어서 밖으로 나가는 교복 입은 무리에게 메롱질을 하거나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답례로 들리는 “우우~”하는 아우성 소리보다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더 커지면은, 그제서야 나는 트럭 뒤에 올라 탄 중학생 꼬꼬마가 즐길 수 있었던 시원한 바람, 동시에 히치하이킹이라는 일탈의 짜릿함과 자유를 맛봤던 것 같다.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넓디 넓은 자연 한 가운데에 숙소는 드문드문. 자다르라는 도시부터 타고 온 버스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날 내려줬다. 내가 예약한 호스텔까지 걸어서 1시간이라는 구글맵을 손에 꼭 쥐고, 이걸 걸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에 빠졌다. 까짓거 못 걸을 게 뭔가, 1시간, 백팩이 15kg 가량 되지만 허리와 어깨 보조끈이 있어 막상 메면 그렇게 무겁지 않다.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걷던 경험을 떠올렸다. 이런 커다란 걸 메고 하루 많이 걸을 때는 하루 10시간도 걸었었는데, 못할 게 뭔가 싶어 당차게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걷던 도로는 인도가 없는 2차선 도로. 차들이 달리며 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고, 커다란 버스라도 지나갈 때면 나는 높은 운전석에 내가 혹여나 안보이지는 않을까, 날 보더라도 실수로 치고 가지는 않을까 싶어 수풀 속으로 살짝 들어가 몸을 움츠려야 했다. 버스가 만들어내는 바람은 또 어찌나 강한지, 버스가 지나간 뒤에는 가방 등과 내 등 사이에 허리 끈 때문에 살짝 떠 있던 옷이 팔락거렸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되겠다 싶어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막상 결심은 해놓고 실천이 쉽지 않았다. 더 이상 15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 아이가 아니라 그런건지, 아니면 여기는 살던 깡촌이 아니라 그런지 손을 휘휘 젓는 것에서 시도가 끝나고 말았다. 그때 불현듯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부끄러울 게 뭐 있어?’ 맞다, 사실 여기가 대한민국 촌동네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오히려 히치 하이킹을 거절 당한다고 해도, 우연에 우연이 닿아 인연이 되는 한이 없는 한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들일거다. 쌩 하고 차를 타고 날 지나간 뒤에는 사실 다시 만나더라도 서로 알아 보지도 못할게 분명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용기가 솟았다. 팔을 쭉 뻗어 온갖 불쌍한 표정에, 저기 길만 따라가면 된다는 손짓 발짓 해가며 차들을 불러 세우기 시작했다. 9번쯤 거절 당했다. 차도 많이 안 다니는 이 곳에서 9번 시도를 실패한 거면 꽤 애를 쓴 거다. 하긴 지금의 나는 교복도, 어려보이는 얼굴도 없는, 큰 배낭을 멘 여행자일 뿐이니까. 이런 생각을 하며 대충 손을 슬쩍 내밀고 마지막으로 차를 세우려고 했을 때, 작은 승용차 하나가 속도를 늦추더니 저 앞에 멈춰섰다. 운이 좋았다.

멈춰선 차에 달려갔다. 큰 배낭이 달랑거리고 달리느라 마구잡이로 바닥에 내리 꽂는 두 다리 덕에 무릎에 하중이 실리는게 느껴지는데도 아랑곳 않고 뛰어갔다. 두 남자가 차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타고 있었다. “Where? Where”을 반복하던 두 사람에게 지도를 보여주자 활짝 웃으며 엄지를 척, 하더니 타란다. 나도 같이 엄지 한 번 척 해주고 올라탔다. 그 뒤에는 형식적 대화, 사실 대화랄 것도 없이 “어디서 왔니?”가 서로 건넨 질문의 전부였다. 두 분은 영어를 거의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머리 속에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질문을 했다. “두 분, 이름이 뭐예요?” 다네와 뤼아드라란다. 생소한 발음이었지만 한글로 받아 적으면 이런 이름이겠지 싶다. 나는 이름 외우는 걸, 특히나 외국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걸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도 금방 까먹을 걸 알고 메모장에 적어놨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한다. 다네와 뤼아드라. 이들은 내 호스텔 근처에서 날 내려준 게 아니라 직접 호스텔 입구까지 들어와줬다. 이들은 내가 내리면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자, “You, Croatia, Remember, Good” 이런 짧은 단어들을 끊어서 말씀하셨다. 완벽한 영어는 아니지만 이들이 하려는 말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좋은 기억만 안고 갔으면 좋겠어.’ 그렇다, 그냥 이들은 보행자로도 없는 차도를 터덜터덜 걷고 있던 여행자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다.

그 다음 여행지 프라하에서 나는 히치하이킹으로만 여행을 다닌다던 호주 남자분을 만났다. 항상 성공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목적지까지 항상 여차저차 도착하신다고 했다. 나도 이 날 이후로 제대로 된 히치하이킹이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남들이 태워주는 차를 타고 이곳 저곳 누비게 될 때가 있게 됐다. 차를 얻어 타는 것에 거부감이 좀 없어졌달까. 태평한 말이지만 세상은 아직 좋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플리트비체 국립 공원에 도착한 첫 날에는 할 것 없이 숙소에서 편하게 쉬며 다네와 뤼아드라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한 건 오랜만이었다. 히치 하이커, 그리고 그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는 사람들. 낯선 이의 차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올라타는 사람들과 낯선 이에게 아무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들. 얼마나 멋진 조합인가. 어릴 적에 걷기 싫어서 하고는 하던 히치 하이킹이 그저 짜릿함만 줬다면, 지금 내가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히치 하이킹은 성공했을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알아가고, 그 나라를 알아가고, 베풂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히치하이킹 같다. 물론 위험은 내가 감수해야하는 부분이고. 다네와 뤼아드라, 이들을 비롯해 아프로디테와 미하엘, 그리고 그 시절 철 없는 만큼 나풀거리던 교복을 입은 그 어린 히치 하이커를 태워준 운전자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남들에게 감사할 일이 참 많다.

나를 데려다주고 가는 이들의 차를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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