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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쑤 Nov 24. 2017

나에게 누군가 길을 물어봤다

영국 워킹홀리데이 #15 내가 정착했다고 느낄 때


하루 이틀은 무척 외로웠는데, 어느 날 아침 길에서 나보다 늦게 이사 온 어떤 사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이 웨스트에그 마을에는 어떻게 오시게 되었나요?" 그는 힘없이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 갈 길을 갔는데, 그 때부터 나는 외롭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안내자요 개척자요 맨 처음 이 곳에 초기 정착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웃간에 보일 수 있는 관심을 나타내 주었다. 그래서 나는 햇빛과 그리고 고속 촬영 영화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쑥쑥 크는 나뭇잎들을 보고 인생은 여름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위대한 개츠비>




가끔 날씨가 좋으면 일하는 곳까지 걸어가고는 했었다. 게으른 나에게는 최선의 운동이자, 런던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실례한다며 나를 붙잡았다.

"여기, 이쪽으로 가면 피카딜리 서커스인가요?"


어느덧 여기 '사는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나 보다. 잠깐 멈춰 서서 런던에 놀러 왔다는 그 사람에게 길을 설명해주었다. 당시 5개월이 넘게 다니던 길이었으니 이 도시가 꽤 익숙해진 게 당연했고,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지도 없이도 자주 다니는 곳 정도는 찾아다닐 수 있게 된 지 꽤 된 것 같다. 마침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 덕에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된 거지만.


이후에도 꽤나 자주 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나에게도 길을 물어본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냥 그게 자연스러워졌다. 나조차도 내가 여기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익숙해진 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런 익숙함은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내가 '내가 런던에 정착했구나'를 느끼던 순간마다 내 옆에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이 존재했다. '외부인'과 '내부인'을 구분 짓는 건 사실 스스로의 판단보다는 소속된 집단의 인정이 필요한 일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안정됨을 느끼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큰 역할을 했던 이유는, 이들의 인정을 받아서라기 보다는 이 사람들이 나의 삶이라는 공간을 메꿔주었기 때문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다가 우습게도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사실 도난당했다. 만취한 여자애의 주머니 밖으로 빼꼼 나와있는 핸드폰은 누가 봐도 매력 적었을 거다. 그런 내게 리카르도는 혹시 모르니까 이걸 들고 가라며 자기 핸드폰 잠금을 풀어서 내게 주었다. 그걸로 부모님과 중요한 사람들에게 휴대폰 잃어버렸다고 연락도 하고, 무엇보다도 집까지 길을 잘 찾아서 가라고, 내일 돌려줘도 괜찮다고 말이다. 그걸 받아 들고 나는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일하러 가서 만난 리카르도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핸드폰을 돌려받고서는 그리웠다며 이리저리 핸드폰을 만지작 대는 리카르도를 보며, 저렇게 핸드폰 없이 못 사는 애가 어제는 나에게 자기 걸 어떻게 그렇게 선뜻 내밀 수 있었을까 싶어 가슴 한 켠이 뭉클했다. 핸드폰을 도난당해서 연락이 어려울 것 같다고 하자 같이 일하는 말리에게도 연락이 왔다. 자기가 안 쓰는 핸드폰이 있는데 내일 갖다 주겠노라고. 그래서 난 새로 핸드폰을 사기 전까지 말리가 준 공기계를 사용해 별로 불편함 없이 다닐 수 있었다. 글쎄, 핸드폰을 도난당하고 생돈을 날려야 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느낀 마음의 풍족함은 잊지 못한다. 나고 자란 곳과 정 반대편에 있는 이 곳에 내가 곤란한 일을 겪을 때 몸소 나서 주는 친구들이 있구나. 내가 정말 이곳에서도 삶을 꾸려가고 있구나 하는 그 마음.


어느 날이었나, 스태프 파티가 끝나고 얼큰하게 취한 엠마가 말한 적이 있다. 집이 멀리 있으니 우리를 가족처럼 여겨줬으면 좋겠다고, 힘든 일이 있으면 우리가 언제나 옆에 있다는 걸 잊지 말라고.



길을 묻는 사람들은 내 삶이 여기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근데 정말 그랬다.

의지할 곳이 있다고 느꼈을 때,

그럴 때마다 나, 여기서 삶을 꾸려가고 있구나

나도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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