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7
부산에 다녀왔다. 나의 친척들에게 수민을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아침 9시 기차를 타는 일정이었는데, 알람 소리에 눈을 떠보니 수민이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내 “기차 시간 11시로 미룰까?”했고 나는 “좋은 생각이야”라고 답했다. 우리의 의사결정은 대개 이런 식이다. 그가 어때 묻고 내가 그러자 답한다. 제법 쿵짝이 잘 맞는 듀오다.
침대에서의 꾸물거림에는 이유가 있었다. 전날 늦게까지 ‘봇 듀오’를 했기 때문이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동네 PC방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를 했다. 내 이십 대 중 1년 반을 내다 버린 그 게임, 친구들과 숱하게 드나들었던 그 ‘협곡’을 둘이 가게 될 줄이야. 게임에서도 우리의 호흡은 나쁘지 않아, 연승 행진을 달렸다.
나는 적을 처치하는 게 주 임무인 원거리 딜러, 수민은 그런 나(그리고 다른 팀원까지)를 보좌하는 서포터를 맡았다. 일전에 재미 삼아 궁합을 보러 갔을 때 우리 관계에서 수민이 늘 ‘서포트 모드’일 거라던 사주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차원을 넘나들며 그는 나를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무튼, 부산 방문은 순조로웠다. 작은 아버지 댁에 어린이 다섯 명을 포함해 스물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좋았다. 조용조용하고 조금은 낯을 가리는 집안 분위기 탓인지 수민을 향해 질문은 거의 없이 그저 고맙다는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그들 나름의 환대. 무어가 그리 고마운지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가 나도 그냥 웃고 말았다.
다음 날 해변가에서 하루를 쉬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산역에서 일광으로, 일광에서 해운대, 해운대에서 기장으로, 기장에서 다시 부산역으로. 짧은 동안에 이동 거리가 꽤나 길었다. 차창 너머로나마 훑어본 고향은 참,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으셨던 한 기사님 말마따나 ‘천지개벽’ 수준이었다. 예전 같지 않음에 별다른 심사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서울역에 도착해 캐리어를 끌면서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집이 같은 게 아직도 좀 신기하다”고 했더니 수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집이 같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산다. 같은 집에서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소파에 앉아 같은 TV를 보고 같은 침대에 몸을 뉘인다. 다시금 깨닫는 것. 우리는 듀오다. 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다음 협곡은 어디일까? 결혼식 전까지 남은 일정은 얼추 마무리한 것 같다. 웨딩촬영도 했고, 각자 친척들도 찾아뵈었고. 양가 부모님 한복 맞추고 청첩장 주문하고 써드파티 형제들과 함 들고 대구 다녀오고 하면 훌쩍 그날이 찾아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밤엔 비행기를 타겠지.
새삼스럽지만 우리 둘의 노고를 치하하며, 오늘 저녁엔 하이볼을 한 잔 말아야겠다. 그간 강한 정신력, 명품 리더십, 유쾌한 팀워크를 모두 보여준 수민에게도 건배다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