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2
21그램 가설, 많이들 들어보셨으리라. 인간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는 가설로 미국의 의사 던칸 맥두걸이 의학 저널 《아메리칸 메디슨》에 처음 제기한 이론이다. 그는 죽음의 순간 인간의 체중이 약 21g 가벼워지는 것을 발견했다며, 그게 곧 인간의 영혼의 무게이며 따라서 영혼은 물리적 물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처음 들었을 때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 세상을 이롭게 하는 근사한 헛소리군, 생각하고 말았는데 요샌 참 이게, 특히 21이라는 숫자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매 21일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껴온 지 벌써 9개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수명에도 무게가 있다면 21g 이상은 족히 깎여 나갈 이 고행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제모 이야기다. 약 10년 이상 ‘털보’라는 두 글자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나이지만, 맞다, 제모 이야기다. 3주 그러니까 정확히 21일마다 종각역 인근의 피부과에서 시술을 받는다. 벌써 12회차까지 마쳤고, 다음 주 월요일에 13번째 인내심 테스트에 돌입할 예정이다. 상상만으로도 입술 주변이 타들어간다. 경증의 PTSD랄까. 하, PTSD가 ‘P부가 Tㅏ고 Sㅏㄹ이 Dㅔ이는’의 약어로 읽힐 정도니, PTSD가 틀림없다.
계기는 단순하다. 수민이 원했고 나도 그리 싫지 않았기에. 수민을 만나고부터는 수염을 기르고 다니지 않았으니, 어차피 매일 면도할 바에 없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웨딩촬영과 결혼식 등에서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결혼식을 치른 이후로도 오래도록 지속해야할진 몰랐지.
사실 그만두려면 그만둘 수도 있다. 차마 그렇게 못하겠는 내 마음이 문제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주변인, 대다수의 남성과 극소수 특이 취향의 (한국) 여성,의 칭송을 받아왔던 내 미염(美髥)은 온데간데없고 폐허만 남은 이 꼬라지를 봐줄 수 없겠는 탓이다. 드문드문 반점처럼 남은 수염자국들이 민둥산이 된 곳들과 대비를 이루며 더 지저분해 보인다. 문화재 터도 아니고… 보존가치 제로다.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정갈하게 수염을 다듬은 나를 감싸던 보헤미안적 아티스트적 퇴폐적 불한당적 코스모폴리타니즘적 간지, 수염인들끼리 길에서 마주쳤을 때 은근히 서로를 의식하며 주고받던 눈길, 수염인이 되지 못한 자들의 선망의 눈초리… 그런 시절도 있었드랬지. 다시 못 올 호시절, 아니 모(毛)시절.
어쩌겠나, 코첼라 페스티벌의 2NE1과 같은 끝내주는 어셈블 어게인은 불가하니 미련을 버리자. 내 나이 올해 서른여섯, 고통을 거듭하며 스물하나 때보다 더 매끈한 피부를 갖는 것도 나름의 성취 아니겠는가. 견디고 또 견디자.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마르틴 숀가우어의 작품. 제목은, 영혼의 무게를 재면서 악마를 발로 짓밟는 성 미카엘 대천사.
천사님, 이건 제 모(毛)입니다만…
쟤 모래니?
내가 모라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