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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23. 2023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어졌어

2023.11.22.

최근 우연히 발견한 만화가 있다. 아쉽게도 한국엔 정식 발행이 되지 않아 불법 번역본을 읽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제목은 <정액제 남편의 용돈만세: 월 2만 1천엔의 쪼들리는 라이프>, 국내에선 약칭 ‘용돈아빠’로 불리는 일본 만화다.


말그대로 한달 용돈 2만 1천엔을 받는 만화가 본인이 어디에 소비하고, 어떻게 절약하면서 한 달을 보내는가를 담은 일상물이다. 작가 본인의 에피소드는 물론,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전국 각지의 ‘용돈 초인’들의 사연을 받아 다양한 인물들의 용돈생활기를 소개하고 있다.


결혼 이후 용돈생활자의 대열에 합류한 나로서 동지들의 짠내나는 스토리에 공감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의 감정은 아니다. 그냥저냥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하며, 참 좋아했던 ‘유 퀴즈 온 더 블록 시즌 1’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매주 챙겨 보고 있다. 아니, 있었다.


굳이 과거형으로 고쳐 쓴 이유는, 어느 대목을 기점으로 이 만화가 내게 제법 특별한 작품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여태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적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던 감정, 상태를 이 만화의 한 컷이 너무나도 잘 묘사해 주었기에, 각별하다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달까.


바로 이 장면이다. 돈을 버는 족족 원하는 곳에 마음껏 사용하던 때를 회상하던 만화가가, 그때의 소비들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이제 더 이상 “자신 이외의 무언가가 될 필요가 없어졌어”라고 털어놓는 이 장면.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삶이 어떻게 변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심심찮게 받아왔다. 매번 ‘안정감’을 골자로 답하고는 했는데, 이 안정감이라는 게 그래서 뭐 어떤 건지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웠다. 과거형으로 쓴 이유, 앞으로는 저 만화가처럼 답할 예정이라서. 그처럼 나도 더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답할 수 있어서다.


돌아보면 이전까지의 내 삶은 관심, 사랑에 대한 갈구의 나날이었다. 팟캐스트를 만들던 것도, 글을 쓰던 것도,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던 것도, 그냥 삶 그 자체가 어쩌면.


문제는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내가 나라는 사실이 탐탁지 않았다는 것. 그러다 보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가장하는 데 힘을 쏟고, 무리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뭐 그런 나날들을 지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물론 그 시절이 즐겁지 않았는가 묻는다면 나름 즐겁고 다이나믹했다고 답하겠지만, 절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테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필요가 없는 지금이, 내가 나로서 최선의 내가 되는 데에 집중하면 되는 지금이, 이 ‘안정감’이 무엇보다 소중하니 말이다.


게다가, 난 용돈도 풍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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