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남은 선박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이런 글귀가 있다.
"知彼知己면 百戰不殆하며, 不知彼而知己면, 一勝一負하나, 不知彼不知己하면, 每戰必殆하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나,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많은 이들에게 잘못 알려져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위태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전쟁에 있어 백전백승이라고 할만큼 완벽한 싸움은 있을 수 없지만 최소한 싸움에 임함에 있어 스스로에 대한 파악은 하고 있어야함의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의 원산 앞바다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손자의 이 말이 제대로 들어 맞은 예라고 볼만한 사건이었다.
누가봐도 초강대국으로 감히 넘볼 수 없을 능력을 가진 미국의 군함이 우습게보던 북한에게 나포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오히려 북한이 원하는대로 모든 것이 마무리된 이 사건은 스스로의 상황에 대한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예리하게 파고 들어온 적에게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로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만재배수량 895톤에 전장 54m, 전폭 9.8m에 최고속도 12.7노트의 제원을 가진 USS 푸에블로함은 1944년 화물선으로 건조되었다가 미해군소속의 정보수집함으로 개조되었던 소형 함정이었다. 정보수집 및 분석이라는 임무에 따라 배의 규모에 비해 많은 83명의 승조원이 승선 중이었고 한반도 근해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의 해군전력은 미국에게 그다지 큰 위협이 아니라고 파악될 정도로 미약한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최대한 북한 근해에 접근하여 반응을 알아보라."는 목적을 가지고 나왔던 푸에블로호는 임무에 충실하게 북한의 원산인근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 이틀전인 1968년 1월 21일의 1.21사태로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하여 군경과 교전을 벌이는 어수선한 상황이었고 이런 이유로 남한도 동해안에서 장차 벌어질 상황에 대해 전혀 신경쓸 경황이 없었던데다 미국의 경우에도 이미 베트남에서 북베트남과의 전면전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서 또 다른 국지도발이나 전면전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래저래 손발이 묶여있는 남한과 미국의 상황을 파악한 북한은 평상시와 다르게 대담하게도 영해로 접근해오던 미국의 정보수집함을 나포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은 먼저 무전을 통해 푸에블로함에게 영해를 침입했음을 경고했고 푸에블로호는 미국 국적선이며 공해상에 있음을 알리며 북한의 일차경고를 무시했다. 곧바로 북한은 고속정과 MIG-21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포위해왔고 그제서야 위험을 느낀 푸에블로함은 피항하기 시작했다. 정선경고에 이어 북한의 함정은 57mm함포를 발사했고 이것이 피탄되며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게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쯤되자 상황이 어려워졌음을 느끼고 기밀문서와 정보분석장비를 파기하기 시작했지만 워낙 많은 문서와 장비를 갖추고 있던 탓에 대부분의 문서와 장비를 지닌 채로 나포되고 말았고 곧바로 원산항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계속적으로 당시 7함대사령부에도 보고되고 있었으나 북한의 근해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대응할 시간적 여유없이 나포로 이어지고 말았고, 뒤늦게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추진항모 엔터프라이즈(CVN-65)와 함대를 동해로 배치시켰지만 82명의 승조원은 이미 북한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푸에블로함은 전투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장은 Cal. 12.7mm 50구경 기관총 두 정이 다였고, 작정하고 항공기까지 동원해서 달려드는 북한의 공격에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운용자체가 기밀사항에 속하는 정보수집임무를 가지고 있던터라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까지 겹쳐있었던 것.
북한은 정확히 이 부분을 파고든 것이었다.
또한, 미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요인이 있었으니 이미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수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준비없이 한반도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행동을 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한 두명도 아닌 80여명의 승조원이 적들의 영토 안에 붙잡혀있는 상황은 구출작전과 같은 특수부대 투입 자체도 난망한 것이었던 것.
결국 그 어느때보다 당황스러운 상태에서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테이블에 나서야했고 인질로 82명의 승조원을 쥔 북측의 '영해침범을 인정하고 명백한 도발행위에 대해 사과해야한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마주하게 된다.
사건 발생 11개월후인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결국 북한과의 협상을 마무리하게 되지만 그 내용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북한의 주장대로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문구를 합의서에 삽입하는 대신, 문서에 서명하는 이유는 오로지 북에 억류된 승무원의 석방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며 푸에블로함은 북한의 영해를 침범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지르지 않은 일에 사과를 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 후, 사과문구가 명시된 합의서에 서명하겠다는 것.
문서상으로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를 명시받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결국 미국 대표 Gilbert H. Woodward 소장이 판문점의 회담장에서 미국의 반박 성명을 낭독한 후 예의 합의문에 서명하며 푸에블로함 피납사건은 마무리되게 된다. 82명의 승조원과 교전 당시 전사했던 승조원의 시신은 크리스마스 하루 전인 12월 23일, 귀향할 수 있었지만 푸에블로함 자체는 북한에 전리품으로 남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평양의 대동강가로 끌려가 북한의 대외선전용 전시관으로 활용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푸에블로함의 승무원들이 풀려나고 4개월 후인 1969년 4월 15일, 미국의 조기경보기 EC-121기가 동해상에서 북한 전투기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군사위성과 정찰기의 눈을 피해 초음속 전투기인 MIG-21 2대를 은닉해두었다가 저공으로 EC-121로 접근하여 바로 격추시켰던 이 사건은 푸에블로함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던 미국이 또 한 번 약점을 치고 들어온 북한에게 유린당한 사건으로 남게된다.
푸에블로함 피납사건과 EC-121 격추사건은 연이어서 미국이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은 상황이었지만 미국은 이런 수모를 겪었으면서도 상황이 여의치않아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북한은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초강대국 미국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북한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UN군 소속의 미군 장교 둘을 도끼로 살해하는 만행까지 벌일 정도로 대담해졌지만 계속 이어진 북한의 도발에 이를 갈고 있었고 베트남에서도 발을 뺐던 미국은 전과는 다른 초강경대응으로 맞서게 되는데 여기에서 북한은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제대로 꼬리를 말게 된다.
이처럼 북한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부분을 여지없이 치고들어오고 강한 모습을 보이면 꼬리를 말고 후퇴하는 전형적인 행동 패턴을 보여주었고 이런 행태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상 푸에블로함과 EC-121 격추처럼 철저한 계획에 따라 준비된 도발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8.18도끼만행과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응하는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
서두에 소개한 손자병법의 글귀가 그저 옛사람의 끄적임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 북한과 미국이 보여준 셈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으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나,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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