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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Apr 17. 2021

유키카제(雪風)

역사에 남은 선박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의 해군력은 미국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고 통상 전력으로 가장 먼저 분류하는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등은 양적, 질적으로도 앞서 있었다. 게다가 서전에 여덟 척의 미해군 전함이 전력에서 이탈하며 거함거포주의를 숭상하던 시각으로도 일본의 전력은 미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항모나 전함과 같은 거함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을 때, 암암리에 접근해오는 적의 비대칭전력 - 잠수함 등 - 을 상대하고 보급선을 확보하는 등의 궂은 일은 대부분 구축함의 일이었고, 미국이나 일본이나 그 어느 대형함정들보다 많은 수의 구축함들이 태어났고 그만큼 많은 배들이 승조원들과 함께 속절없이 바닷 속으로 사라져갔다.


개전 당시 미국의 주력 구축함이었던 플레쳐급 구축함과 거의 비슷한 크기를 가지고 있던 카게로급(陽炎級)구축함은 일본 구축함 전대의 주력으로 1939년부터 취역하기 시작했던 신형 구축함이었다. 전장 118.5m, 전폭 10.8m, 만재배수량 2,540톤의 크기에 127mm주포 3문을 장착하고 있던 카게로급은 전장 114.8m, 전폭 12.0m, 만재배수량 2,500톤의 플레처급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은데다 최고속도도 1노트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거기에 같은 구경의 주포로 무장하고 있어 펀치력에 있어서도 막상막하의 전력이었던 것.


하지만, 19척이 생산된 카게로급과 175척이 생산된 플레쳐급에서 알 수 있듯 공업능력 자체에서 일본은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전쟁이 시작되고 제대로 집중하기 시작한 미국의 공업력을 일본은 결국 넘지 못하고만다. 

구축함 유키카제(雪風)

1939년 3월 24일, 카게로급 8번함으로 취역한 유키카제는 태평양전쟁 시작부터 참전했지만 수많은 작전 중 사라져간 동료들과 달리 종전까지 거의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살아남아 기적의 행운함으로 불리웠던 구축함이었다. 1942년 2월의 자바해전부터 자살특공작전이었던 1945년 4월의 텐고작전까지 16회 이상의 작전에 참가하면서 무사했던 배는 유키카제가 유일무이했다.

 

그저 운이 좋아서였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 그 '16회 이상의 작전'이 초반 작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열세인 상황에서 압도적인 적을 상대하는 것이었다는 것. 그 덕에 다른 함정의 승조원들에게는 다른 배들의 운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아가는 불운한 존재로 여겨지면서 사신(死神)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미해군 Porpoise급 잠수함 USS Perch(SS-176)

유키카제의 첫 전과는 1942년 3월 자바해전에서 거두게된다. 동급의 카게로급 구축함이었던 아마츠카제(天津風), 하츠카제(初風)와 더불어 벌인 대잠초계작전에서 USS Perch(SS-174)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자침시키는 첫 전과를 올린 것. 하지만, 대전내내를 통틀어보면 유키카제의 전과는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이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당시만해도 Gun Camera(총기와 연계되어 있는 카메라)와 같은 객관적인 근거로 격추수를 따질 수 있었던 항공기와 달리 함정의 경우, 자신들이 직접 보고해서 그 전과를 인정받는 형태였는데 대부분의 전과가 부풀려지기 마련이었고, 심한 경우에는 격침된 적함이 6척이었던 상황에서 함대에서 보고한 전과만 취합해보면 28척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객관적인 근거자료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와 별개로 정작 유키카제의 死神이라는 별명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들은 계속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 첫 번째 희생자(?)는 1942년 10월말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나온다. 당시 유키카제는 정규항공모함이었던 쇼가쿠(翔鶴)의 호위함으로 작전에 참전했는데 이 작전에서 미국의 항모 호넷을 격침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쇼가쿠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만 것.

일본 정규항공모함 쇼가쿠(翔鶴)

다음 희생자(?)는 다음 달이었던 11월, 과달카날 해전(제3차 솔로몬해전)에서의 전함 히에이(比叡)였다. 기함으로 함대전에 나섰지만 서로를 발견하지 못한 야간에 난전으로 벌어지기 시작한 서전에 히에이는 겁없이 코앞까지 접근해온 미국 구축함 USS Laffey(DD-459)에게 함교를 난사당하며 함대사령관 아베 히로아키가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참모장과 더불어 함교의 대부분 승조원들이 전사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 것. 

USS Laffey (DD-459)

게다가 날이 밝으며 미해군의 급강하폭격기들이 몰려들며 히에이는 결국 최후를 맞고 말았다. 사령관이었던 아베 히로아키 중장은 침몰전 가장 가까이에서 호위함의 역할을 띄고 있던 유키카제로 옮겨탔고 사령관을 승함시킨 유키카제는 바로 모항인 히로시마현의 구레군항으로 후퇴하며 작전에서 이탈한다.

공고급 전함 히에이(比叡)

이처럼 유키카제는 호위하던 함들이 속속 적의 손에 무력화되거나 침몰당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게 되는데 사실 이런 이유로 사신이라는 비아냥을 듣기에는 적잖은 억울함이 있었다. 당연히 공격해오는 입장에서는 주목표로 정해진 것이 항모나 전함처럼 대형 전투함인 경우가 많고 주변에 있는 작은 구축함 따위는 공격당시 고려대상도 아니었던 것. 전함도 못막은 항공기의 내습을 빈약한 무장의 구축함이 완벽하게 틀어막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어디로 피항을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한 승조원들에게 이만큼 모욕적인 표현도 없었을 터.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비스마르크해전과 솔로몬제도 인근의 콜롬방가라에서 벌어진 해전에 참전하며 분투했지만 그사이 멀쩡했던 유키카제와 달리 유키카제가 소속되어 있던 16 구축함전대가 모조리 녹아 없어지며 전대에서 혼자 살아남은 구축함이 된 것. 구축함 한 척으로 구성된 전대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었고 아직 건재했던 17 구축함전대로 편입된 유키카제. 하지만, 여기에서도 그들의 행운(?)은 계속된다. 기동 중 암초와 접촉하며 수리를 위해 일선에서 빠진 상황에서 필리핀해 해전이 있었고 일본 해군은 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세 척이 격침당하고 3,000여명의 인원이 몰살당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된다.


필리핀해 해전의 가장 큰 타격은 가용할 수 있는 항공기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에 있었다. 제공권을 잃어버린 함대가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되는지는 이미 일본의 수뇌부들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었고 이어진 레이테만 해전에서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게된다. 유키카제도 레이테만 해전에는 최전선 구리다 함대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사마르해전에서 USS Johnston(DD-557)등 미국 구축함들의 목숨을 건 반격을 뜷고 공격의 선봉에 서는 활약을 펼쳤지만 전황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후 침몰하는 배들의 선원들을 구조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퇴각하는 함대의 호위를 맡았고 귀환 이후 소속된 17 구축함전대가 야마토급 초대형 항공모함이었던 시나노(信濃)의 호위를 맡게되면서 시나노의 근접 호위함으로 뽑히게된다. 그리고.....

야마토. 무사시의 동급함이었던 항공모함 시나노(信濃)

1944년 11월 29일, 시나노는 미국 잠수함 USS Archerfish(SS-311)의 어뢰 4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취역 열흘만에 침몰한다. 일본함대가 차곡차곡 지옥문고리를 잡아가는 동안 유키카제는 그런 위험한 상황 한 복판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계속 불운을 피하는 불명예(?)를 겪고 있던 것. 


하지만, 주전력들이 일소된 일본해군은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며 작전을 펼칠 여력 조차 남지 않았고 군항이었던 구레까지 미군 중폭격기의 사정권안에 들어오게 되면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함대 자살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이른바 天号作戦(천호작전 : Operation Ten-Go).


1945년 4월 6일, 일본의 상징이었던 전함 야마토를 순양함 야하기와 8척의 구축함으로 호위하며 오키나와로 출발했고 이 가운데에 유키카제도 끼어있었다. 하지만, 출발 후 구축함 아사시모(朝霜)는 엔진에 고장을 일으켜 회항했고(회항중 미국 항공기의 공격으로 침몰), 미국은 이미 출발 직후부터 추적해오던 잠수함들과 정찰기의 통신으로 항공지원이 전무한 상태로 야마토와 그 호위함대로만 전력이 구성되었음을 파악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일본 함대는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


작전이 시작되자 미해군은 8척의 항공모함에서 400여대의 공격대를 발진시켰다. 진주만 기습 당시 일본군이 동원했던 항공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격대를 야마토를 향하여 발진시킨 것.

1945. 4. 7 텐고작전에서 미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선수부터 침수 중인 전함 야마토(우측)와 호위함 유키카제

항공기 엄호가 없는 상태의 전함을 향해 400여대의 폭격기를 동원한데는 야마토 자체가 엄청난 대공방어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한 부분도 없지않아 있었겠지만 일본제국주의 그 자체인 전함 야마토를 기어이 박살내고 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


당연히 공격은 야마토와 순양함 야하기로 집중되었고 벌떠같이 달려든 항공기들의 공격으로 야하기는 야마토에 앞서 침몰된다. 야하기의 승조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접근했던 유키카제의 자매함 이소카제도 미폭격기들의 폭격에 함께 격침당하면서 순식간에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호위함대 전력에서 사라지게 된 것.


남은 구축함 6척으로 야마토를 호위해야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공격에 명중탄을 두들겨맞은 야마토도 침수가 시작되었고 결국 그저 물 위에 떠있는 고정 목표물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야마토의 최후. 맨 좌측부터 유키카제. 하츠시모, 후유즈키, 폭발한 야마토

1945년 4월 7일 14시23분, 치명타를 입고 기울어가던 야마토에서 폭격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가 주탄약고에 옮겨붙으며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고 그렇게 일본의 상징이었던 야마토는 산산조각 난 채 물 속으로 사라져갔다.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이긴 했지만 유키카제에서도 대공 전투중 3명의 사망자와 십여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당장 침몰당한 동료함의 승조원들의 구조가 시급했던 터, 미국 항공기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구조에 나섰고 살아남았던 구축함 하츠시모, 후유즈키와 더불어 1,000여명의 인명을 구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자살공격으로 인해 단 하루만에 4,000여명의 인명이 몰살당했고 이후 일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작전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으로 떨어지고 만다.


1947. 5.26 중국에 배상함으로 보내기 위한 작업 중인 유키카제

이후 유키카제는 별다른 작전 투입없이 종전을 맞게되는데 종전후, 각지에 흩어져있던 일본인들의 귀환업무에 투입된다. 1945년 12월 1일, 귀환수송함으로 지정되어 주포와 어뢰발사관 등 무장을 모두 제거했고 이듬해인 2월 11일, 중국 광동성으로 향하며 일본에서의 마지막 임무에 투입된다.

귀향을 위해 승선했던 사람들에게 '이 배는 전쟁 중에 어디서 먹고 놀았길래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는가?'라는 비아냥까지 들을 정도로 완벽한 상태였다고. 귀환 중에 임산부가 배에서 출산하는 경사(?)도 맞이했던 유키카제는 그해 12월 28일까지 총 15회의 임무에 종사하며 총 13,000여명의 인원을 고국으로 무사히 귀환시키며 임무를 마무리하게 된다.


임무를 마치고 이틀후인 12월 30일, 전후배상함으로 지정되었고 이듬해인 1947년 중화민국으로 보낼 34척의 배상함 중 하나로 선정되며 7월 3일 상하이에 도착, 7월 6일, 중화민국 해군의 구축함 接一號로 명명되었다가 이듬해 1948년 5월 1일, DD-12 丹陽(단양)으로 정식 명칭을 부여받게 된다.

1947. 7. 6 중국해군으로 인계되고 1948. 5. 1 DD-12 丹陽으로 명명된 후의 유키카제

유키카제가 단양이라는 이름을 받고 새로운 조국으로 맞이한 중화민국도 당시 어수선한 상황이렀고 결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배하며 국부천대(國府遷臺 : 중국본토를 버리고 대만으로 정부를 옮김)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중화민국으로 옮겨왔어도 행운함 유키카제의 운은 여전했는데 대만으로 피난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임무에 차질없이 종사했고 주력함대의 대부분이 반란을 일으켜 중공으로 이탈한 상황에서도 중화민국 해군의 주력으로 남아있었으며, 19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44일간 벌어졌던 중화민국과 중공과의 금문포격전에서도 금문도의 중화민국군을 지근거리에서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그 어떤 피해도 입지않았다. 이듬해인 1959년 8월에는 금문도로 접근 중이던 중공의 초계함 두 척과 포격전을 벌여 한 척을 격침시키고 한 척은 대파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는데 여기에서도 단 한 발의 포탄도 맞지않는 강운을 과시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노후화는 피할 수 없었고 1966년 11월, 현역에서 예비전력으로 빠지게 된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강운함 유키카제를 영구보존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고 아베 前 총리의 외조부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주축이 되어 雪風返還運動議員連盟(유키카제 반환운동 의원연맹)이라는 단체의 명의로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에 퇴역한 유키카제를 반환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하게 된다.

하지만, 1969년 그동안의 강운에 걸맞지않게 대만으로 불어닥친 태풍으로 선저와 외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유키카제는 이동이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했고 결국 1970년 중화민국 해군 함정에서 제적되고, 1971년 폐선처리되며 영구보존하려던 일본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1971년 12월 8일, 대만은 유키카제의 타륜(Steering wheel)과 닻(Anchor)을 일본으로 반환했고 현재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의 구 해군병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히로시마 에타지마 전시관에 전시중인 유키카제의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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