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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재성 Mar 22. 2022

이별의 과정

할머니의 소천에서 장례까지 

3월 13일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의 산소포화도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시기는 하지만 반응도도 저하되고 있다는 소식.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써보겠지만 임종이 머지 않은 듯 싶다는 의료진의 전화에 집에서 수지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달려갔다. 모니터를 통해 만난 할머니는 가쁜 숨을 쉬고 계셨지만 그래도 침대의 핸드레일을 손으로 꽉 쥐고 계셨고 그 모습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본 나는 ‘아니야, 이겨 내실 수 있을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세시간 정도 지켜보다가 아버지 역시 팔십이 넘으셨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고 아버지를 설득해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 속으로 할머니의 건투를 빌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했지만. 


예정대로라면 코로나 양성반응 후 일주일이 경과되는 상황으로 격리가 해제되었어야할 날이었지만 3차까지 접종을 하셨음에도 코로나 바이러스란 놈은 할머니의 나이를 집요하게 파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어르신들에게 치명적이라는 폐렴으로 번지며 최후의 수단으로 렘데시비르를 투여하시자마자 급전직하를 시작했던 할머니의 용태. 무사히 이겨내시길 바라는 마음과 고되고 힘든 과정이라면 차라리 더 고생하시기 전에...하는 마음이 솔직히 교차되기 시작했다.

요양원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셨을 때의 모습

3월 14일

오전의 통화에서 할머니의 용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할머니께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신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잠시 원기를 회복하는 상황 - 산소포화도도 극적인 수치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수준으로 오르고 의식도 좋아지는 상황. 하지만, 의료진은 여전히 위독한 상황이라는 것을 주지시켜왔고 그 소식을 듣는 입장에서도 기적이 아니고서는 여기서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의 준비는 웬만큼 하고 있던 상황. 이런 일련의 상황은 가족들의 단톡방에 그대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고 다들 나나 아버지와 같은 각오였으리라. 저녁나절, 다시 병원에서 들려온 절망적인 소식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던 것도 그런 각오가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월 15일


11시 38분, 할머니께서 떠나셨다. 향년 102세. 


나는 내 약처방전을 받으러 동네병원에 있다 그 소식을 들었고 담담하게 사실을 전하는 병원직원에게 몇 시까지 찾아 뵈면 되겠냐는 질문과 준비해야할 것들을 간단히 물어보고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아버지와 고모에게 전화로 할머니의 소천사실을 알렸다. 15시까지 병원으로 오셔서 할머니의 시신을 인수하시라는 얘기에 장례지도사로 활동 중인 동생의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친구로부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하루에 세상을 떠나시는 분이 너무 많아서 빈소를 구하기부터 정말 어렵다는 것, 코로나로 인해 돌아가신 경우 거의 화장을 선택하게 되는데 화장을 담당한 각 지자체의 국공립 화장장들이 엄청나게 밀려드는 인파로 짧으면 6일에서 길면 8일까지 화장의식 자체가 딜레이 된다는 것. 그 친구는 우선 강동구 보건소에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선(先)화장 스케쥴을 잡아보라고 귀띔해주었고 나는 즉시 보건소로 연락을 해서 콜센터에 담당자에게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얘기를 전할 수 있었다. 20분 정도 후 담당자로부터 할머니의 사망진단서와 이메일로 보내주는 양식을 채워서 보내주면 내일(3월 16일)에서 늦어도 17일까지는 화장 스케쥴을 만들어주겠다는 전언을 들었고 일단 병원에서 빈소로 할머니를 모시고나서 늦게라도 서류를 보내주겠다고 대화 후, 이메일 주소를 받고 전화를 마쳤다. 

할머니의 사망진단서

마침 동생의 친구로부터 어렵사리 의정부의 을지대학병원에 장례식장을 잡았다는 전화가 전해졌고 일단 할머니를 모시는 계획은 모두 선 상황에서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동 중에 빈소는 내일(16일)부터 열릴 것이고 오늘 하루는 우선 안치실에 안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고 병원 측에서 말한대로 정확히 15시에 요양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COVID-19로 사망한 경우, 원칙적으로 염이나 입관등에 가족들의 참관은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준비된 수의로 갈아 입히는 과정도 생략되고 비닐 PACK에 돌아가신 상태 그대로의 시신을 넣어 관에 넣는 것으로 입관을 마무리하게 된다. 가족들의 감염을 막기위한 조치이지만 가족을 보내는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일터, 할머니께서 숨을 거두신 병원에서는 그런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최대한 위로하기 위해 CCTV를 통해 입관과정을 가족들에게 생중계하기로 했고 병원 밖에 마련된 장소에서 가족들은 병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지켜 보기로 했지만….갑작스레 점검까지 마쳤던 CCTV의 연결이 두절되었고 거의 40분 가까이 연결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끝끝내 연결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병원 측에서는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우리 가족들에게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해주었는데….가족 중 대표 하나를 뽑아 의료진과 동일한 방호복으로 무장시킨 후, 직접 할머니의 입관과정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 대표로 뽑혔고…할머니께서 병상을 떠나 관으로 옮겨지는 모든 과정에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떠나시는 할머니 손도 잡아보고 머리도 쓰다듬어 드릴 수 있었던 것…그때 두절되었던 CCTV도 연결되었고 결국 가족들은 내 눈과 카메라, CCTV 모두로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지켜볼 수 있었다. 


병원에서 준비된 리무진에 할머니를 모시고 의정부 을지대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빈소를 차리는 일정이 이튿날부터 예정되어 있었기에 할머니를 안치실에 모시고 간단히 장례식장과 커뮤니케이션(빈소의 위치, 준비물품 등)을 마치고 - 할머니 빈소가 열리는 시간은 아침 10시로 예정되었지만 9시 30분에 식사와 내방객분들의 식사를 도와 주실 이모님들 두 분이 오시기로 해서 다들 9시 30분에 만나기로 했고 - 다들 일단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할머니의 사망진단서 등 제출서류를 강동구 보건소 담당자의 이메일 계정으로 남겨두었다.

할머니의 빈소

3월 16일, 17일 – 빈소에서

아침 9시에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할머니 영정을 빈소에 꽃으로 꾸며 설치했다. 할머니의 영정사진…8년쯤 전, 영정사진을 찍어 둬야 오래 건강할 수 있다는 큰할머니의 의견에 할머니께서 동의하셨고 내게 그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친구에게 핫셀블라드 카메라와 80mm 렌즈를 빌리고 강남의 렌탈 스튜디오를 한 시간 예약해서 두 분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꼭 밝게 활짝 웃으시는 모습을 담고 싶었지만 사진기 앞에서 두 분 모두 꽁꽁 얼어붙어 버리시는 통에 나만 카메라 삼각대에 박아 두고 재롱을 떠는 형국이었지만 웃음인 듯 아닌 듯 엷은 할머니의 미소가 담겼고 막상 그 사진을 오늘 에야 확인한 가족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받으며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다. 


낮부터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셨고 나 역시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마음으로는 어제 보낸 문서에 대한 보건소 측의 답변이 없어 답답해 하고 있었다. 


보건소 담당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연락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 메일주소로 결과를 최대한 빨리 알려주셨으면 좋겠다는 메일을 날린 것이 14시 45분. 그런데 14시 50분경, 한 통의 전화가 내 폰으로 울려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승화원입니다. 김길연 님의 화장이 금일 실시될 예정이오니 16시 40분까지 승화원으로 오셔서 등록절차 밟아 주시기 바랍니다.” 두 시간도 남기지 않고 날아든 전화에 나와 모든 식구들이 당황했고 결국 장례과정을 주선해주고 있던 동생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렵사리 15시 40분까지 운구를 담당할 리무진을 준비했다는 연락을 받고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과연 1시간안에 벽제까지 도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걱정을 다시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의정부에서 벽제까지 30분이면 충분히 간다는 이야기에 일단 운구를 담당할 인원들 4명을 뽑았고 리무진에 할머니와 함께 승차할 사람과 다른 차로 이동할 세 사람으로 조를 짜 두고 운구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연락을 좀 해줬으면 이런 허둥거림이 없었을 것을 하며 강동구 보건소의 대응에 솔직히 처음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이런 코로나 난리통에서 일이 처리된 것만해도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위안하고 있을 때, 강동구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일찍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하다는 말에 이미 운구차도 섭외 되었고 지금 바로 승화원으로 이동한다는 것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한다는 인사로 통화를 마치자마자 운구차 아저씨께 연락이 왔고 안치실에서 할머니를 모셔와서 리무진에 모시고 함께 벽제로 달리기 시작했다.


16시 15분, 벽제에 도착했고 나는 접수처에 가서 접수를 마치고 증명서를 받아두었는데 그제서야 17시부터 이루어지는 화장의식은 원래 일과시간을 마친 후, 시간외로 이루어지는 의식임을 알게 되었다. 주로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선화장이나 계속된 사망자의 증가로 인한 적체로 어쩔 수 없이 늦은 시간까지 화장의식을 이어 나가야 하는 서울시의 고육지책이었다는 것도. 23기가 설치된 승화원의 화구시설은 Full로 작동 중이었고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던 17번 화로도 16일 하룻동안 6번째로 운영되는 중이었다. 

할머니의 화장이 진행된 시간은 대략 1시간 20분. 한 줌 흙으로 변하신 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빈소에 할머니를 모셨다. 

고향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교회를 가신 이후, 기도는 할머니께 일상이셨다

3월 18일

할머니는 30여년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곁에 합장으로 모시기로 결정되었고 생전 몸을 담으셨던 영락교회 경조부에서 안장과정을 담당해주기로 했다. 이 과정은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께서 맡아서 진행해 주셨고 아침 8시에 목사님께서 오셔서 발인예배를 진행하시고 바로 8시 30분, 가족들만 조촐하게 장지로 향했다. 이미 할아버지 곁에 할머니의 안식처가 마련되어 있었고 도착즉시 바로 할머니의 안장의식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아버지 곁에 자리 잡으시는 할머니

매일 집에서 부르시던 곡을 가족들이 부르는 가운데 할머니는 조용히 할아버지 곁에 고된 몸을 뉘이셨다. 백두해의 삶이 단 나흘만에 정리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나흘사이 수많은 이들의 도움, 내 일처럼 나서준 그들이 아니었다면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이다. 신의 섭리는 번쩍거리는 기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옷을 적시는 가랑비처럼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서서히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기간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곁에 계시지 않지만 믿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세상에서의 만남을 준비하는 기간일 뿐이니 남은 이들이 열심히 살며 재회를 기대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

할머니께서 100세 생신을 맞이했을 때의 가족사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을 때도, 장례기간내내에도 참아냈던 눈물이 주민센터를 찾아 할머니의 사망신고를 하며 주책없이 흘러내렸다. 늘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그 명단을 든든히 지탱하고 계시던 이름 석 자가 빠져버렸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 가셨구나, 가버리고 마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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