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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23. 2016

아홉 번째 잔, 바닐라 라떼

여유의 맛

스팀으로 따듯하게 덥혀진 우유는 풍성하고 부드럽다. 살찌는 것이 두렵지만 바닐라 라테에 저지방은 안된다. 물론 무지방도. 이 풍만하고 폭신한 맛을 날씬해진 얄팍한 우유로는 절대 낼 수 없다. 기울어진 잔에, 손으로 뜬 니트 같은 거품이 한 템포 느리게 움직이자 재빠른 커피가 먼저 입에 닿는다. 비릿한 우유 향을 바닐라가 살포시 누르고 한껏 감미로운 커피가 되었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맛이 어디 있으랴.

 

커피가 나오고 우린 각자 급한일을 처리하느라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친구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노트북으로 눈을 돌렸다. 친구가 주문한 커피는 라테였다.


친구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는 졸업을 앞두었을 때쯤, 그는 요즘 카페만 가면 배가 아파 꼭 화장실을 가야 한다고 했다. 특정 카페만 다니느냐 물어보았는데 주로 가는 곳은 있지만 다른데서도 그랬다고 했다. 본인은 카페에서 사용하는 물이나 우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당불내증이네."


내 말에 친구는 펄쩍 뛰었다. 자신이 우유를 얼마나 잘 마시는지 이야기했지만 그건 본인의 입이었고 장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쉽게 인정하지 못할 만도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 내내 하루에 200ml씩 우유를 마셔왔고 고3 시절 매일 밤 커피우유로 잠을 쫓았었는데 어떻게 유당불내증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인이 되어 유당불내증이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람 외에 어느 동물도 성체가 되어서는 젖을 마시지 않는 것을 상기하면 이해가 된다. 유아기 모체의 젖을 먹기 위해 가지고 있던 젖당 분해 효소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줄어들거나 활성이 떨어진다. 경중의 차이로 발생 시기가 다르긴 하지만 아시아계 성인 90%는 유당불내증을 가지고 있다.


먹을게 얼마나 많은데 우유 좀 못 마시는 게 무슨 큰 문제겠느냐 만은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문제가 되었다. 친구는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었고, 사실 동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 부드러운 라테를, 풍성한 거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 뒤로 친구는 우유를 조금 겁내는가 싶었는데 그냥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맛있는 커피를 위해서 그 정도 불편은 감내하겠다는 여유. 행복을 위한 작은 불편은 이런 여유로 쉽게 해결된다.


기분 좋을 정도로 따뜻한 온도, 입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매끈한 거품, 커피와 우유의 적절한 비율.


나는 로자 아줌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약속이라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이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中


나도 라테를 위해서는 작은 여유가 필요하다. 주문 직전까지 고민하는 저지방과 일반 우유 사이의 갈등. 우유는 송아지가 소가 되기 위해 마시는 것이고 나는 이미 충분히 자랐음에도, 맛있는 라테를 위해서는 나의 다이어트도, 우유의 다이어트도 접어 두어야만 한다. 지방에 대한 포용력이 필요하다. 쓴 커피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지방을 그대로 품어야만 매끈한 거품과 부드러운 맛을 얻을 수 있다. 저지방이나 무지방처럼 다이어트를 한 우유들은 연약하게 제자리만 지킬 뿐 커피를 위한 여력이 없다. 우유의 지방은 커피를 둘러쌓고 두툼하게 입으로 들어온다. 가칠한 손톱 끝에 매니큐어를 바른 것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맛이다.


스팀으로 따듯하게 덥혀진 우유는 풍성하고 부드럽다. 살찌는 것이 두렵지만 바닐라 라테에 저지방은 안된다. 물론 무지방도. 이 풍만하고 폭신한 맛을 날씬해진 얄팍한 우유로는 절대 낼 수 없다. 기울어진 잔에, 손으로 뜬 니트 같은 거품이 한 템포 느리게 움직이자 재빠른 커피가 먼저 입에 닿는다. 비릿한 우유 향을 바닐라가 살포시 누르고 한껏 감미로운 커피가 되었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맛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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