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의 맛
으적으적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주황색에 조금 긴장했다. 분명 날 것 그대로의 비린 맛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단맛에 어우러지는 옅은 흙내음이 난다. 물 한 방울 넣지 않았다는 당근 착즙 주스는 그대로 농축하면 예쁜 색의 설탕이 될 것 같았다. 단숨에 마시고 나니 솜털같이 남은 섬유질에서도 으적거리는 씹는 소리가 들릴 듯 했다.
목적이 따로 있었던 제주도 행이었기에 숙소 외에 별다른 여행 계획은 없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골고루 예약해 둔 게스트 하우스를 기준으로 이동하는 사이에 목적지를 정하는 즉흥 여행이 되었다. 무계획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나는 사행성이 첨가된 것에 유난히 약했고 기준 없이 정해진 여행지는 모 아니면 도였다. 맛있게 생긴 것도, 소문난 식당도 입에 맞지 않을 때가 있었고 오히려 기분따라 찾아 들어간 식당의 음식이 기가 막히게 맛있기도 했다. 그런 점이 복권을 긁는 것 같은 재미를 주었다.
이틀 째 아침,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제공되는 딸기 잼을 바른 식빵과 믹스 커피만 먹은 터라 개운한 것이 필요했다. 생각같아서는 멸치육수로 개운하게 끓인 김치찌개나 시원한 냉면같은 것을 원했으나 한쪽 벽에 커다란 토끼가 그려진 낯선 가게가 눈에 들어와 지나치지 못하고 발을 들이고 말았다.
흰색 페인트를 손수 칠한 듯한 단출한 1층 건물이 도로 가에 외따로 자리하고 있었다. 메뉴도 외관 만큼 단출했다. 음료는 커피와 허브티, 당근 주스가 전부였고 쇼케이스에는 당근 케이크와 당근 머핀뿐이었다. 밖에 그려진 토끼가 당근만 먹지는 않을 터인데 씹을 수 있는 거라고는 당근뿐이라니, 나는 꽝을 예상하고 뒷걸음질 쳤지만 친구는 썩 마음에드는 모양이었다. 평소는 단걸 즐기지 않던 애가 고집을 부렸기에 이건 먹어야만 했다. 스타벅스 송악산점으로 향하던 길이라 커피는 제외하고 당근주스 두 잔과 당근케이크 한조각과 당근머핀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당근주스, 당근 케이크, 당근 머핀.
당근, 당근, 당근.
나는 철저한 선택 섭식 주의자이다. 다시 말해 심각한 편식쟁이란 말이다. 익은 채소의 뭉글 거리거나 서걱하는 질감이 싫고 두 발로 짓이긴 것 같은 신선한 풀 냄새도 질색이다. 되도록 음식을 가리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바쁘게 젓가락을 옮기는 버릇이 있었지만 이미 차려진 한 상에는 당근 외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이렇게 까지 긴장하긴 처음이었다. 사면초가였다.
빨대 끝에 입을 대고 살짝 음료를 당겼다. 투명한 빨대를 타고 진한 주황색이 가까워질수록 긴장한 혀가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겁먹은 것이 무색할 만큼 당근주스는 정말 맛있었다. 맹맹한 맛도 없었고 특유의 비린내도 없었다. 다른 과일의 단맛 없이 작고 단단한 당근들이 오밀조밀 들어찬 맛이었다. 마치 색다른 열대과일 주스 같았다.
당근 주스의 맛을 보고 긴장이 풀렸지만 쉽사리 케이크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골라낼 수도 없이 잘게 다져진 당근들이 케이크 절편에 딸기 씨처럼 박혀 있었다. 당근 주스는 당근의 질이 좋다면 충분히 맛있을 수 있지만 케이크는 다르다. 당근은 당근 나름의 풍미를 내야 하고 케이크는 당근을 위한 것인지 케이크 자체를 위한 것인지 분명한 노선을 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당근의 맛을 살리기 위한 맹맹한 케이크도 싫고 당근의 맛과 케이크의 맛이 따로 노는 것도 싫었다. 그냥 당근 케이크가 싫었다. 내 마음도 모르는 친구는 친절하게도 케이크를 똑같이 절반으로 나누어 주었다. 사양하고 싶었지만 친구는 이미 당근에 홀려 있었고 그 맛을 나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야, 왜 그래.
실내는 주인 내외의 자부심으로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원목을 깎아서 만든 테이블은 흔치 않은 수공예 품이었고 박물관에 있을 법한 다기들이 책장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테이블은 아마 손님이 아닌 주인 내외를 위한 쉼터였을 것이다. 곳곳에 시간과 여유가 듬뿍 묻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당근뿐인 메뉴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케이크는 분명 맛있을 것이다.
카레에 들어있는 커다란 당근을 입에 넣었을 때처럼 꿀떡 삼켜버릴 생각으로 케이크를 한 입에 우겨넣었다. 당근 냄새가 나는가 싶었는데 크림치즈와 달콤하게 구워진 흑설탕의 향이 났다. 케이크 사이에 크림치즈는 약간의 생크림을 섞어 부드럽게 만들고 달게 한 것 같았다. 전반적으로 담백했다. 당근의 비린맛은 크림치즈와 흑설탕이 잡아 주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잘 만든 케이크였다. 아이는 없지만 내 아이에게 사주고 싶은 건강한 맛이었다.
이제 편식을 고치고 당근 케이크를 좋아하게 되었다면 아름다운 마무리겠지만 제주도에서 좋은 가게를 찾았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가끔 맛없는 당근을 먹으면 그 달콤했던 당근 주스가 생각나긴 한다. 당근 주스야 말로 제주 당근을 보여 주기에 가장 담백하고 달콤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