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가 지나간 자리
여행에 관한 대화는 분위기를 전환하는데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날은 그렇지 못 한 드문 날 중 하루였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해외는 물론이고 동네 뒷산, 가까운 해변을 다녀온 이야기마저 설레는 기분과 일탈의 자유로운 향을 풍긴다. 시작은 그랬다. 이후 대학 친구들과 가까운 바다로 떠났던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가 따라오지 않아서 가보니까 펑펑 울고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이었어요?"
"강아지가 죽었다고 연락을 받고 그랬던 거예요."
황당하다는 듯, 재미있는 일을 이야기하듯 말해주던 그분의 얼굴이 살짝 벙 쪘다. 그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웃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짧은 침묵이 미적거리며 겨우 자리를 비웠다.
"그럴 수 도 있죠."
[강아지가 죽었대요.]라는 말의 무게는 개와 살기 전과 후로 크게 달라진다.
봉구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나도 아마 웃었을 것이다. 고작 강아지 때문에 여행까지 와서 그렇게 울 수 있느냐며.
봉구와 함께 살고 있기에 웃을 수 없었다. 고작 2년 남짓 동거한 개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따뜻하고 복슬한 덩어리가 내 삶에 큼직하게 자리를 잡고는 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다.
매번 뜯기는 월급의 일부,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는 낭비벽,
퇴근 후 집에서 잠깐 하려던 일을 크고 따뜻한 엉덩이로 뭉개버리는 고집불통,
자신 몫의 사료와 간식은 혼자 먹으면서 내 밥은 꼭 탐내는 엄청난 식탐,
온갖 단점으로 무장한 털 복숭이는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어서 더 치명적이다. 대체 어디까지 내 삶을 침범할지 기대되면서도 먼 훗날 그 자리가 비었을 때의 허전함이 벌써부터 두렵게 한다. 함께 살던 개가 죽어 슬프겠다는 공감과 나와 살아가던 이 개가 죽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슬픔 같다.
십 년 넘게 함께하던 반려견이 세상을 떠나자 꼭 닮은 강아지를 데려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기르는 지인들이 있다. 다시는 반려견을 기르지 않는다는 지인들도 있다. 반려견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이 떠난 이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무게를 동반한다. 봉구를 만나기 전에는 삶에 이런 종류의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그들이 왔다간 다양한 흔적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