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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Nov 25. 2024

베토벤의 문라이트와 월광 소나타

일상의 변론

우리는 천재을 찬양하는가. 아니면 나랑 유사한 인간을 선호하는가. 천재는 생래적인 것으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능력이 찬란하게 빛난다. 장삼이사가 그것을 우러러 볼 수 있더라도 그것을 답습하거나 모방할 수 없다. 왜? 선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천재와 둔재로 나뉘어 살아가는 이유는, 둔재가 천재를 모방하거나 답습해야 발전적 상황이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재는 모방할 존재가 없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하다.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감정과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천재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태양으로 이상하리 만치 삶이 갹팍하고 어지럽고 단순하며 짧다. 우리의, 둔재의 삶들은 오히려 복잡하고 지단하며 길다. 


베토벤은 귀가 멀었음에도 문라이트를 작곡하고 연주했다. 치명적인 결함이 천재적 귀결로 발상된 것이다. 우리는 둔재이고 어떻게 살더라도 두각된 삶의 결과를 초래하기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천재를 부러워해야 하지 않는 이유이다. 타고난 것을 길러서 모방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귀가 멀어 문라이트를, 피아노의 떨림의 길고 짧음으로 연주하는 베토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답습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다. 그 고독과 고립과 천재의 산실에서 살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살 수 없음으로 주어진 시간을 견디거나 감내하면 된다. 


나는 피아노의 건반의 계명을 모른다. 미래도래미미미. 그 정도이다. 모짜르트, 베토벤의 독특하고 기이한 삶의 궤적을 따라 살 수는 없는 일이고 그것을 이해하거나 답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달란트만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그저 존중하거나 감탄하거나 그럭저럭 천재적 삶과 둔재의 삶의 구별을 통해 잘 먹고, 잘 살고, 우애스러우면 감사한 일이고 그렇게 수용해야 한다. 도드라지고 싶기도 하다. 추앙받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능려과 재능이 평범한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그럼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 철저한 고독과 고립, 하늘에서 들리는 독특한 소리와 감정을 둔재들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접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천재적 인물들을 통해 둔재들이 감상하는 세상, 그것이 소수의 고통을 통해 다수의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신의 섭리일 것이다. 우리가 천재적 감각과 사상, 교훈을 퍼뜨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할 일이 최대한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반짝반짝 작은별도 따라 할수 밖에 없고, 엘리제를 위하여도 마냥 들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행복이다. 우리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면 얼마나 무수하게 연주하고 기록해야 할 것인가. 


행복이란 단순하고 단백하게 주어지는 것들에 대한 감각으로 충족될 수 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천재가 아닌 이상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다. 당신이 지금 지극히 단조롭고 평범하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장수의 비결일 것이다. 천재적 고독의 산실을 범인들은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현실이 최대한의 상황임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독특하고 다소 튀는 삶의 양태를 추구한다면 삶은 이러저러하게 균형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나는 적당히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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